"가난한 노동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돈'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이내 씁쓸해진다. 해마다 통장에 찍힌 월급액은 조금씩 늘어가지만, 나가는 돈은 그보다 빨리 늘어난다.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도 희망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법이 정한 근로시간은 주40시간이라는데, 잔업 특근으로 주 50시간 이상을 일했다. 쉬는 시간도 아끼고, 아파도 참으면서 일하는데, 희망이라는 '돈'은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는 '돈'을 희망해보기나 했던 것일까.
2013년 겨울, 전국의 4개 공단에서 임금 실태와 희망임금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반월시화공단에서는 250명이 참여했고, 전국에서 3,717명이 응답했다. 설문에 응한 공단 노동자들의 월평균임금은 198만7천 원이었다. 응답자의 절반이 주 50시간 이상 일하는데. 절반 이상이 본인의 임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 당연하다. 2013년 법원이 개인파산의 기준으로 삼은 3인가족 최저생계비는 189만 원이다. 하루 평균 10시간 일을 해서 유지되는 것이 파산 직전의 생계다. 이 굴레를 벗어날 희망을, 과연 우리는 품고 있는 것일까.
설문에 응답한 노동자들의 희망임금은 256만 5천 원이었다. 월급이 57만 1천 원은 올라야 한다. 헉. 만약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돈'을 희망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희망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번 희망임금 조사에서 드러난 진실은 이렇다. 임금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적게 받는 사람들은 더 적은 희망을 품는다는 것. 남성의 희망임금이 여성보다 높고, 일을 구하기 쉬운 30대가 다른 연령보다 희망임금을 높게 적었다. 관리직과 기술직이 더 높은 임금을 희망하고, 공단 노동자들의 대부분인 생산직의 희망임금이 가장 낮았다.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의 희망임금이 높고, 사업장의 규모가 클수록 희망임금도 높다. 희망은 이미 현실의 굴레에 붙들려있어, 희망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희망은 갇혀 있다. 그런데 희망을 가두는 것은 내 처지가 아니다. 내 처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고 내 처지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구조다. 몇 차 하청인지 따지기가 민망할 정도로 제조업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공단, 최저임금만 위반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받아야 할 임금이 얼마인지 듣지 않는 사장, 못 받을 만하니 못 받는 거라며 마음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그래서 남 얘기하듯 희망을 혼자 한숨처럼 내쉬어버리고 움켜쥐지 않는 우리……. 우리가 움켜쥐지 않으니, 희망은 세상이 정해준 대로 널을 뛰고, 우리는 주어진 대로 그 안에서 먹고산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야말로 서로가 얼마나 고된 일을 하는지, 얼마나 살기가 팍팍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가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은 이렇다. 얼마가 됐든, 우리는 우리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급액수를 볼 때마다, 한 달 500만 원 벌면 소원이 없겠다고 혼잣말하다가, 정작 사장한테는 5만 원 올려달라는 말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 주는 대로 받아야 했던 우리. 그러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공단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모이니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보인다. 그것은 '돈' 이상이다.
57만 1천 원 정도는 더 받을 만하다고, 받아야 한다고 서로에게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희망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싸울 수 있는 우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돈’도 희망할 수 있다. 주는 대로 받던 임금, 달라는 대로 받으려면, 모여야 한다. 사람들이 뭐라든, 사장이 뭐라든, 몇 차 하청이든, 받아야 할 만큼 달라고 말이라도 시작해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