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와 인권 팀은 상반기 동안 고려대에서 일하는 청소용역 노동자분들을 만났다. 인권위 집단 진정을 위해 한 분 한 분을 만나 그/녀들이 원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사회권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최저임금제도의 비현실성을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권의 언어로 함께 외치려고 했다. 고려대에서 몇 년 전부터 청소용역 노동자분들을 만나왔던 학생들의 역할이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이제 고려대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그/녀들의 주장을 펴나갈 것이고 이미 하반기 동안 적지 않은 자리에서- 거리에서, 토론장에서- 그/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 꺼내기를 주저하던 미화원의 모습이 아닌, 당당하게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하반기 활동을 고민하면서 고려대만이 아닌, 가능한 한 많은 대학의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만나 대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바꾸어가자는 계획을 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획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었다. 최저임금을 현실화하는 투쟁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인권팀이 사랑방의 사회권운동 1)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팀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즉, 최저임금 현실화가 절실하고 유의미한 과제이지만 임금을 통해 사회권을 이야기하는 것에 한계 혹은 난점들이 지적되었다. 이를테면, 최저임금투쟁이 불안정노동층과 빈곤층 모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거나, 최저임금 현실화가 가족임금제도 2)의 문제점들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신자유주의와 인권팀은 가을부터 세미나와 토론을 통해 사회권운동과 최저임금/사회공공성 강화의 관계를 검토하기로 했다. 나름의 흥분과 기대가 이어졌던 시간 동안은 즐거운 토론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정책토론이 가까워질수록 시무룩해진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 ‘걷는 것은 사고의 한 형태’라고 했다던데 걸어야 할 때 걷지 못하고 앉아있어야만 했던 우리들에게 일단 위로의 말을 보낸다.
정책토론의 발제문이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라와 있을 테니 자세한 요약은 필요없을 듯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권운동의 전략을 모색해보려 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본격화와 더불어 번져나갔던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굳이, 최저임금 현실화보다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에 주목하는 것은 앞서 지적되었던 난점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 있다. 노동할 수 없는/노동하지 않는 이들의 권리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추상적인 사회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프로그램’이 필요할 텐데(이를테면 최저임금제도라는, 지금은 보편화된 제도 역시 ‘공정하고 유리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다.)
사회공공성 강화투쟁 혹은 기존의 다양한 부문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을 것이 많다는 점도 있다. 마침,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동정이나 시혜에 기반한 복지제도가 아니라, 그/녀들의 권리에서 출발하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기에 ‘사회권’과 ‘사회공공성 강화’가 서로를 상승시켜줄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이 절대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아직 글과 말일 뿐인 고민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펼쳐질 수 있는지가 정책토론의 결과를 평가할 잣대가 될 것이다. 토론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점 혹은 제안들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사실, 위의 토론은 노동권이라는 매우 독특한 질감의 사회권을 논외로 한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라 사회권운동의 전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현실화가 소중한 요구라는 점에 대해 인권운동의 책임있는 입장도 필요하다. 또한 사회권운동을,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에 대한 답은 만들어가야 할 숙제다. 자칫, 정책을 생산하는 것에 머무르는 활동이 될 수도 있고 투쟁이 있는 곳에 달려나가는 몸대주기에 머무르는 활동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정책토론의 결과에 기대할 수 있는 긍정성은 적어도 우리가 토론을 하는 동안, 사회권 취약계층 3)의 목소리와 투쟁으로 사회권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을 확인한 데서 출발한다. 고려대의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만나기 쉽고 모이기 쉽다는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우리가 사회권 취약계층 ‘사회권 취약계층’은 엄밀하게 선택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토론을 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라는 단어 대신에 사회권이 침해된 사람들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녀들이 우연히 구성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밝힐 수 있는 ‘사회권 취약계층’이라는 단어를 일단 사용하기로 했다.
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틀거림에서 출발하지 않는 인권이란 굳어버린 규약을 넘어설 수 없다. 2기 국가인권위가 사회권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케케묵은 주문을 다시 외워보는 것은 지나친 주의주의일까?
결식아동에게 지급되는 도시락에는 분노하면서 결식아동의 수가 십만에 이르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묻어버리는 것을 사회권운동이 쫓아갈 수는 없다는 마음을 나누며 한숨은 쉬이 걷히지 않겠지만 환호를 예감한다.
하지만 건강권, 주거권 등 ‘사회권’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어떤 권리’들은 노동권과 몇 가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유권과 사회권으로의 구분 자체에 존재하는 정치적 함의를 폭로하고 통합적 인권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할텐데 그것은 한편으로 각각의 권리들의 성격에서 드러나는 차이들에 주목하는 접근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번 정책토론에서 논의된 ‘사회권’은 노동권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2) 가족임금제도는 한 가구/가족의 생계부양 책임을 가부장(대개는 남성)에게 지움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국가 책임을 가족으로 떠넘기는 동시에 여성의 가사노동의 의미/가치를 남성의 노동력 재생산으로 환원해버리는 제도다. 봉고차 안에서 함께 죽은 할머니와 아이들, 벽장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 아이에 호들갑을 떠는 사회는, 연민을 통해 ‘우리’와 관계없는 일임을, ‘그 가족’의 문제임을 확인할 따름이다.
3)‘사회권 취약계층’은 엄밀하게 선택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토론을 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라는 단어 대신에 사회권이 침해된 사람들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녀들이 우연히 구성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밝힐 수 있는 ‘사회권 취약계층’이라는 단어를 일단 사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