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6개월 만에 이제 유서대필을 강기훈 씨가 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확인되었습니다. 13일 저녁, 진실화해위원회는 마침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스스로 감정 결과를 뒤집은 것과 사설 감정소들의 감정 결과를 근거로 1991년 김기설 열사의 유서는 김기설 본인의 것이며, 강기훈의 필적과는 다르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을 얻기까지 동지의 죽음을 부추기면서 유서를 대필까지 하여 준 패륜아로 강기훈 씨가 살아야 했습니다. 그만이 아니라 1991년 5월의 거리, 두 달 동안 13명의 열사들이 발생했던 그 참혹했던 그 거리, 최루탄이 포연처럼 휩쓸었던 그 매캐한 연기로 뒤덮였던 그 거리를 눈물로 내달렸던 사람들은 가슴 한 켠에 지울 수 없었던 멍에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짐이었던 유서대필조작사건이 사실은 조작이었다는 그 너무도 당연한 ‘상식’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개운치 않았습니다.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감정 결과에만 기대어 검찰은 기소하고, 법원은 1심, 2심, 3심 모두 유죄를 판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강기훈 씨가 3년형을 받아야 했던 그 재판은 무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거기까지는 가려면 멀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해야 하고, 그 청구를 법원이 수용한 뒤에 다시 재심이 진행된 뒤에야 16여 년 전의 결과는 비상식적인 결과는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기훈 씨가 3년 2개월의 감옥살이를 할 때 드레퓌스 사건이 12년 만에 해결되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니까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프랑스가 아니므로 12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서야 진실을 밝힐 단초를 만들었습니다.
그 정(正)에 해당할 진실의 실체가 밝혀지려면 이런 것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유서를 대필했다고 조작해서 당시의 민주화 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를 탈출하자고 기획한 책임자와 그에 가담한 이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왜 공안부도 아닌 강력부가 이 사건을 전담했고, 경찰은 배제한 채 검찰이 사건 수사를 주도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당시 국과수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이 필적 감정에서 유서 필적과 강기훈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결과를 내놓도록 한 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닌지, 법원도 정치권력의 시녀로서 검찰의 기소대로 판결하게 된 이유와 정치적 압력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밝혀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재심과정을 통해서 밝혀지고, 그를 통해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뒤에, 국가는 강기훈 씨에게 사과하고, 물질적인 배상을 비롯한 제반의 배상과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지금까지 16년 6개월, 그리고 앞으로 재심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의 그 세월 동안 그가 당했던 정신적인 피해에 대해, 그리고 그 훼손된 명예에 대한 원상회복이 되는 것일까요? 이미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은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강기훈, 그의 이름은 김기설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동시에 주는 아픈 이름입니다. 그의 앞에서 누구도 떳떳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에 대해서도, 그리하여 지금은 암 투병 중이신 그의 어머니에게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그 어머니는 전화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말씀드리는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특히 사랑방 사람들한테. 어머니의 그 한 말씀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뭐라 말하기 전에 울컥 감정이 솟구쳐서 그만 도중에 전화를 황급히 끊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가 아니지만, 그리고 12년도 훨씬 더 지났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끝내는 밝혀졌던 것처럼 이 사건의 진실이 그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사랑방으로서는 단체 설립 이전부터 책임져 왔던 이 사건의 진실을 어느 누구보다 더 간절히 원하고 있고,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 그것은 국가폭력의 어두운 과거를 아프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 세월을 이겨온 강기훈 씨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때 같이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과 함께 ’진실과 건전한 상식의 승리’를 믿고, 마침내 진실의 한 복판에 서게 될 때까지 우리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날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단지 옛말이 아니라 오늘에도 실현되는 진리임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