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다시 갈 거였다. 알면서도. 갈 때 마다 어찌 할 바를 모를 것이라는 것, 그런 거 내 알바 아니다 하면서도 좋아하고 지치지 않을 거라는 것, 얘기하다 해온 것 없고 아는 것 없음에 낯 뜨거워 질 것이라는 것... 인권 내지 운동이라는 말들. 발만 하나 담근 채 오랜 시간 애써 외면해 왔다. 불편하고 잘 못 된 것에 대해 소리 내는 게 좋아서 기웃거렸으면서 선뜻 더 적극적인 것은 주저했다. 인권운동은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나는 겁먹었던 것이다. 인권운동은 그들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당당하고, 아름답고, 가진 것이 많았다.
- 내가 세상에 길들지 못한 후부터.
내가 맨 처음 인권운동의 맛을 본 건 고등학교 때. 이거 뭔가 불편해 죽겠는데 모두들 가만히 있었다. 그게 싫어서 반항하다 부모님께서 학교오시길 두어 번... 그러다 나를 눈여겨 본 한 은인(선생님)의 도움으로 토론이라는 정당한 수단을 통해 미친 듯이 학교에 떠들어댔다. 그 때 접한 것이 젠더, 가족, 경제-신자유주의. 너무 좋아 눈물이 나고 잠도 안 왔다. 왜 이렇게 세상이 부조리 한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대학 들어오니 자리 펴 줬는데 ‘너희들의’ 놀이터 같아서 소위 운동권 모임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겠는가? 여성위원회를 하면서 여학생 잡지 ‘헐스토리’를 만들었다.(졸업직전 한 학기 있었지만..) 신을 만났다. 마치 나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는 언니(성매매 피해여성-성노동자라 호칭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직 내 입장은 그렇다.)들의 인생 얘기들이 나의 아픔을 치유했고,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왜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그걸 좀 알아달라고 얘기하게 되는지 언니들이 가르쳐 준 것이다. 감춰져 있던 세상의 진실을... 이제 나는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낯선 서울에서 키보드를 두드려 사랑방을 찾았다. 혹자가 말한 여성의 뛰어난 채집능력이 웹상에서 십분 발휘되는 순간이다. 사랑방에 안착 한지 약2주일, 난 진정 훌륭한 채집능력의 소유자다. 새롭게 문제를 발견해 가고 연대할 줄 아는 분위기는 나를 흥분시킨다.
- 어차피 정답 없는 인생,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인권운동을 만나면 어깨에 힘이 빠져서 건강에 좋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깊숙이 숨겨 와서 가라앉아버린 속내를 풀어내지 못한다. 왜 일까? 아까 말했듯이 그들의 것 같아서 일 수 도 있고, 한 편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모든 걸 ‘이해한다’는 눈빛이 말문을 막을 수 도 있다. 다음은 순전히 내 생각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인권운동은 우리네 삶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정답 없는 내 인생의 생각을 끄적여 본다. ‘오답 일세’라고 소리치면 뭐 할 수 없고... 나는 인권운동이 필요한 현장에 좀 더 ‘온정적인’ 도움의 손길을 주자고 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불필요한 도움을 주고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겠다고 떼쓰는 것일 수 있다. 당연한 걸 제자리에 놓는 정도로 보면 안 될까?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되 다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인권운동이다. 그래서 인권운동이 세상에게, 세상이 인권운동에게 우리의 체온 36.5℃로 편안히 스며들어가길 바란다. 마치 sf소설집 제목처럼 “이거 사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세.”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위에서 ‘MB귀에 운하반대하기’같은 반응과 *불편함을 느끼면서 지혜롭게(?) 사람이 세상에 맞춰야 한다는 인생관을 펼쳐 보인다면 흔들리지 말고, 오롯이 ‘당신자신’이 되어서 우직하게 세상을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고 웅녀의 정신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자. 그 쪽에서 반응을 보이며 조금씩 엉덩이를 들썩일 때 까지. ‘불편해. 불편하지 않아? 그치? 너도 느끼지? 느낀다고 말해’라고! 알겠니, 재은아??
<*표시 사이의 내용은 신영복 교수님의 모 대학 입학식 축사에서 인용해서 변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