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인권의 시선으로 되짚어보며 다른 사회를 열어가는 구체적인 제안들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문장을 건네며 2017년 3월 21일,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두고 자원활동가들에게 노란리본인권모임을 제안했습니다. 관심이 있는 상임/자원활동가들이 모여 노란리본인권모임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열심히 한 활동은 세월호 참사를 인권의 시선으로 되짚어보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인권의 대전환 (샌드라 프레드먼)』과 유럽인권재판소의 여러 판례를 읽으며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떠올렸습니다. 『재난을 묻다 (416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에 담긴 국내 재난참사 사례와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박상은)』 에 담긴 해외 재난참사 사례를 살피며 재난참사가 불행한 우연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가 쌓여 발생하는 필연적 결과라는 인식을 공유했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해온 활동가들을 모시고 여전히 남아있는 진상규명의 과제를 살피고,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결과보고서」와 국회에 발의된 「국가재난조사위원회 설치법안」을 읽으며 재난참사 진상규명의 역할을 고민했습니다.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을 함께 들은 뒤에는 재난참사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감각을 나눴습니다.
키워드 :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2019년 첫 번째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그간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고민을 나눠왔는데 그렇게 쌓인 이야기를 모임 외부와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라는 아쉬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모임이 만들어졌던 첫 해에 공부한 내용을 모아 문집을 제작하기도 했고, 2018년 5월에는 ‘문재인 정권 1년, 생명과 안전의 권리는 어디쯤 왔나’ 토론회를 공동주최하기도 했지만, 노란리본인권모임의 고민을 충분히 나누지는 못했다는 평가였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더 널리 나눌 수 있도록 지난 2년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자료집 등으로 제작해보자고 결정했습니다.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는 그간 다양한 주제로 많은 자료를 살펴왔는데요, 이 방대한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피해자의 권리’를 잡았습니다. 재난참사 피해자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말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정작 현실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피해자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일단 피해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재난참사는 무엇이고, 피해자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가.”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던 질문입니다. 이 무거운 질문을 떠올리며,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재난참사 피해자가 겪는 시간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1995), △화성 씨랜드 화재(1999), △대구 지하철 화재(2003), △춘천 산사태(2011), △태안 해병대캠프(2013), △세월호(2014), △장성 요양병원 화재(2014), △스텔라데이지호(2017),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017). 총 아홉 개의 재난참사를 겪은 피해자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관련 저서와 연구,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그렇게 살펴본 피해자들의 경험은 서로 다른 재난참사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닮아있었습니다. 미비한 구조 체계, 혼란스러운 재난참사 현장에서 권리를 떠올릴 겨를도 없이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 피해자들이 모여서 진실을 요구하기 시작할 때 경청하기는커녕 탄압을 일삼는 국가가 모든 사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재난참사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사회의 정의와 안전은 세워지지 않고, 피해자가 회복할 길은 열리지 않은 채 이 모든 재난참사의 역사가 제대로 기억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재난참사의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겪어온 시간을 살피며 피해자의 권리 체계를 정리했습니다. 재난참사의 진행에 따라서 1) 재난참사가 발생하는 시점, 2) 사람들이 재난참사 현장에 모이는 시점, 3) 피해자들이 모이고 말하는 시점, 4) 진실·정의·안전·회복·기억을 위한 시점 등으로 분류한 뒤 각 시점에서 더욱 강조하고 유념해야 할 피해자의 권리 항목을 토론해 내용을 채웠습니다.
초안을 작성한 뒤에는 실제 재난참사 피해자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재난참사 피해자 간담회’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이신 유경근 님을 모시고 피해자가 겪어온 시간을 육성으로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유경근 님의 말씀을 통해서 피해자의 모임과 참여를 통한 진상규명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여전히 남은 세월호 진상규명의 과제도 확인했습니다. 또한 피해자를 대상화하며 회복과 치유를 논할 때 회복은 더욱 멀어지기에, 피해자의 회복을 들먹이기 전에 먼저 피해자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권리와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 다시 한 번 실감하며, 피해자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지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세월호 5주기를 앞두고
그렇게 올 1월부터 세 달이 넘도록 집필과 수정을 반복한 끝에, 2019년 4월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을 발간했습니다. 앞으로 올 한 해 동안 자료집 내용을 검토하고 보완해나갈 계획입니다. 보완한 내용으로는 핸드북을 제작해 더욱 널리 배포하려고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의 <2019 인권프로젝트-온> 지원도 받게 되었어요. 지금 시점에서 자료집을 완벽하게 정리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조금 무리해서라도 발간한 이유는, 세월호 5주기를 맞아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는가는 그 사회가 재난참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는지와 맞닿아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자고 했던 다른 사회는 어떤 사회여야 하는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두고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을 내며, 이 안에 담은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수많은 재난참사 사건들에서 피해자들이 싸우며 쌓아온 시간을 함께 떠올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자료집은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한 시작이다. 앞으로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는 자료집을 매개로 다양한 재난참사 피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재난참사에 마주할 수 있는 누구든지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길 바라며 핸드북 제작 등의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 과정이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말과 행동에 힘이 되길, 나아가 재난참사를 함께 겪은 모두가 피해자들의 이웃으로서 연대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되길 바란다. -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 발간사 중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중요한데, 누군가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그 사람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재난참사는 무엇이고, 피해자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노란리본인권모임 나름의 응답을 담아 자료집을 제작했습니다. 재난참사 피해자는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이 사회가 더욱 넓고 깊게 이해할 때 비로소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논의가 펼쳐질 것입니다. 세월호 5주기를 마주하며 많은 분들이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은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