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 그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과 막막함, 한국 사회는 재난을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재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한탄 정도라면, 결국 우리는 절대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를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재난을 만드는 구조적 원인을 밝혀내고, 그에 따른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가모임인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는 2017년부터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피해자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약 2년여 간 공부하고 토론해온 내용을 모아, 2019년 4월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과 2019년 12월 『잊지 않고 싶은 당신에게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말하다』 핸드북을 발간했습니다.
재난 피해자의 권리를 묻다
△ 삼풍백화점 붕괴(1995), △ 화성 씨랜드 화재(1999), △ 대구 지하철 화재(2003), △ 춘천 산사태(2011), △ 태안 해병대캠프(2013), △ 세월호(2014), △ 장성 요양병원 화재(2014), △ 스텔라데이지호(2017), △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017). 총 아홉 건의 재난에 대한 서적과 연구, 언론 기사 등을 살펴봤습니다. 각 재난의 피해자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들여다보니, 서로 다른 재난의 피해자들은 놀랍도록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에게 닥친 일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고, 혼란스러운 재난 현장 이후에도 회복은커녕 또 다른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거짓말과 발뺌으로 일관하는 정부, 보상금을 들먹이며 모욕을 쏟아내는 언론도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재난을 우연한 사고로만 바라보고, 재난 피해자를 불행한 사람들로만 인식할 때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재난을 구조적 인권침해로 이해하고 재난 피해자가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재난 이후 이전과는 다른 사회를 그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노란리본인권모임은 재난 피해자의 권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리 체계의 초안을 작성한 뒤에는 간담회를 통해서 재난 피해자들께 의견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5주기 즈음,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을 발간했습니다.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말하다
자료집 발간 이후, 자료집의 내용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핸드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연 초에 계획을 세울 때는 조금 쉽게 생각했어요. 자료집으로 피해자의 권리 내용을 한 번 정리하고 나면, 이후 핸드북을 만드는 일은 더 수월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자료집을 단순히 압축하는 정도로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힘들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두꺼운 자료집 중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전할지 논의를 이어나갔고, 이 과정에서 재난/피해자에 관해 활동해온 활동가와 연구자를 만나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분들이 재난 피해자와 만나온 시간, 재난에 대해 시민들에게 말 걸어본 경험을 나눠주시며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지 함께 궁리했습니다. 『잊지 않고 싶은 당신에게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말하다』 핸드북은 이렇듯 여러 분들이 나눠주신 말과 마음에 기대 만들어졌습니다.
핸드북 내용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눠서 구성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재난과 피해자에 대해서 흔히 “그런가 보다”하고 넘겨왔던 통념을 짚어봤어요. 폭우나 태풍 등 자연재해 앞에서 한숨과 함께 내뱉게 되는 “그래도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는 말, 피해자를 안타까워하며 선의로 건네는 “얼마나 힘들까”라는 말 등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그간 재난 피해자가 만들어온 ‘변화를 위한 싸움들’을 되짚어봤습니다. 재난 이후의 사회에서 진실·정의·안전·회복·기억의 권리를 세우는 과정에는 언제나 피해자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바로 이 피해자들의 싸움에 기대어있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외에도 핸드북에는 여러 명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워크노트, 읽어보면 좋을 책들이나 재난 피해자의 권리 체계 등 부록 등이 담겨있어요. 이전에 제작한 자료집에서 제시했던 재난 피해자의 권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잊지 않고 싶은 당신에게 가닿기를
처음 계획으로는 자료집 100부, 핸드북 2,000부를 제작할 예정이었어요. 웹으로 pdf 파일을 배포할 테니 인쇄본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홍보를 시작하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자료집과 핸드북을 받아보고 싶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예산을 변경해서 자료집 400부, 핸드북 3,000부를 제작해 일일이 발송하면서도 힘들기보다는 반갑고 기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재난과 피해자를 ‘잊지 않고 싶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말’을 건넬 수 있으니까요.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없이 외쳤던 구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 이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기에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난의 반복을 막기 위한 싸움, 더욱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싸움에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잊지 않고 싶은 당신에게 노란리본인권모임이 발간한 자료집과 핸드북이 잘 가닿아,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 다운로드 링크
=> https://www.sarangbang.or.kr/writing/72593
『잊지 않고 싶은 당신에게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말하다』 핸드북 다운로드 링크
=> https://www.sarangbang.or.kr/writing/73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