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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행히도, 지금 계급사회라고 하면 좋은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 노예 제도나 카스트 제도를 당연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다. 최근에 유행했던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이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계급측정기’ 표도, ‘계급’에 대한 자조 섞인 비판일 것이다.
그런데 ‘계급사회는 나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헌법에도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 계급사회는 역사 속 악습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해도 괜찮을지 약간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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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력으로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받는다. 내가 돈을 벌어서 내 집을 산 것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서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침해받는 것 같으면 재산권이라는 권리 이름으로 보호해주기도 한다. 내가 이룬 것을 침해받지 않는 것은 일종의 ‘정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나’와 ‘내가 이룬 것’들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지, 어디에서 선을 그을 수 있을지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의 노력의 결과를 자녀에게 전해주는 것은? 부모님께 살 집을 마련해드리는 것은? 자식에게 상속도 제대로 못할 거면 뭐 하러 열심히 일하느냐는 얘기는 흔하게 들린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은 가족과 이성애 제도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문화를 총동원한 일종의 욕망 공동체”라는 표현이 딱 와 닿는다([정희진의 어떤 메모] 사회적 특수계급, 한겨레, 2016년 11월 25일자).
재벌 상속이나 부동산 세습 등 누가 봐도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좀 더 미묘한 상황을 가정해보면 더 어려운 것 같다. 난민이 지금 나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은 월급을 받고 똑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그 자체로 불공정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뭔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고, 뭔가 침해당하는 것 같고, 뭔가 달라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들이 나와 같은 조건을 요구할 때 느껴지는 불편함.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 같은 압박. 남성이 여성을 볼 때,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볼 때, 내국인이 이주노동자를 볼 때,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볼 때, 서울 사람이 지역 사람을 볼 때, 겨우 아파트 한 채 마련한 사람이 최근 부동산 논란을 볼 때 어떤 마음일지. 그 마음들이 카스트 제도를 만든 아리아인의 마음이나 노예시대 미국 백인 농장주의 마음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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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세상 살기 빠듯할수록 지금 내가 가진 것이라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재산과 직업, 사회적 위치를 지킨다는 정당성이 한 두 세대만 거듭해서 자리를 잡으면 너무나도 쉽게 계급사회가 부활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런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지, 인권운동이 답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은근슬쩍 기대어본다. 아니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와 무관한 사람들, 심지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이룬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자애명상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