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이 생각이 있고, 외모가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권리가 있습니다.”
‘주거밀집지역 한복판에 이슬람 사원 건립 결사반대’ 현수막이 곳곳에 걸린 대구 북구 대현동 주민들에게 무슬림 유학생과 그 자녀들의 편지가 전해졌다. 대현동의 경북대학교 서문 인근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이슬람 사원은 이미 지난해 건축허가를 받았지만, 주민들의 반대 민원을 우선시한 북구청의 공사중지 행정명령에 의해 수개월째 공사가 중단된 상황이었다. 교인들은 주민들에게 쓴 편지에 다양한 나라․인종․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모든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공존의 길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다행히 지난 7월 법원이 북구청의 공사중지명령에 대해 집행정지를 결정하며 이슬람 사원 공사가 재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공존의 길’은 열린 것일까? 이슬람 사원이 세워지고, 무슬림이 많아지면 치안이 불안해질 뿐만 아니라 테러의 본거지가 될 거라는 인식은 대현동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슬람 사원을 다른 곳에 지으라는 주민들과 북구청의 요구에 교인들이 응답할 수 없었던 이유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주민과의 ‘갈등’ 속에 남겨두고, 권리는 부정한 채 ‘공존의 길’을 열 책임을 이슬람 교인들의 몫으로 밀어두는 사회야말로 바로 그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하나의 집단’으로 타자화 되는 무슬림
‘주민들이 이렇게 반대할지 몰랐다’ 이슬람 사원 건립을 추진해왔던 이들의 당혹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경북대 소속의 유학생과 연구원,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슬람 교인들은 이미 해당 지역에서 7년여간 주민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주민과 각지에서 모인 대학생 그리고 초등학생들이 같이 공존하는’ 주택가라는 이유로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입장은 공존의 공간에서 무슬림을 쉽게 제외시킨다. 무슬림을 한국 사회의 동료 시민이자 권리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외부에서 유입된 불온한 집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2020년 한국리서치의 종교 인식 조사에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와 함께 이슬람교에 대한 호감도를 물었을 때, 이슬람교에 대한 호감도는 한국 사회 4대 종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게다가 전체 응답자의 72%가 매우 낮은 호감도를 보였다. 무슬림을 일상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사회에서 무슬림이 국민 이외의 존재이자 국가의 경계 바깥에 존재하는 이방인, 그래서 내부를 위협하는 존재로 자라 잡은 결정적인 시기는 2018년 제주도에 예멘 출신의 ‘무슬림’ 난민이 도착한 이후다. 외국인이 우리와는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 외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배타적인 외국인혐오(Xenophobia)와 함께,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와 규범을 파괴하는 존재로서 무슬림이 등장하는 이슬람혐오(Islamophobia)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전까지 외국인혐오는 주로 제3국가 출신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인종주의,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생계를 위협한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외국인․반다문화 담론 속에서 작동해왔다. 하지만 이슬람혐오는 강압적인 종교 생활과 폭력적인 남성중심주의, 히잡이나 턱수염 등 한국 사회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종교적 상징과 이를 체현한 인종적․문화적 정체성을 근거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는 야만적이거나 반인권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무슬림이 타자화되는 과정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슬람 내부의 종교적 다양성, 세속주의적 정치 운동의 등장과 무슬림 내부의 문화변동,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신앙심의 다양한 실천 등의 차이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거나,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고 혐오를 생산․유포한 행위 주체의 중심에는 무슬림의 시민권을 보장할 책임을 회피하며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슬람을 도구적으로 동원하거나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국가권력이 있다.
공략해야 할 시장이거나 퇴출시켜야 할 위험요소이거나
<18억, 이슬람 시장이 뜬다>는 한 방송사의 특집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국가와 지자체는 블루오션이 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2010년대부터 ‘이슬람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해왔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방문 이후 추진된 익산 할랄식품 단지 조성, 2016년 대구시와 경북 지자체의 '한국형 할랄 6차 산업 육성' 사업,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도한 충남 부여의 할랄 도축장 건립, 2017년 무슬림 관광객 유치를 위한 강원도의 ‘할랄타운’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사업들은 보수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집단적인 반발에 부딪혀서 좌초되거나 전면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혐오는 언론과 대중에게 ‘이슬람 특혜 반대’, ‘오일머니에 눈먼 대한민국 이슬람화 반대’, ‘테러범 양성소 반대’ 등의 표어로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유포되었다. 2018년에는 평창 올림픽에서 무슬림 선수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이동식 기도실 설치 계획이 취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수개신교의 이러한 이슬람 적대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이슬람혐오가 특정 집단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무슬림의 권리 보장을 무력화시키는 다방면의 시도들을 제3자의 위치에서 갈등 혹은 논란으로 치부해왔다는 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를 해소해나가야 할 역할과는 정반대로 무슬림이 위험하고 반사회적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며 시민권을 박탈해온 것 역시 국가권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5년 테러방지법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테러단체 추종 혐의로 구속한 사건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테러나 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를 입증할 수 없자,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해당 노동자를 강제 출국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파리 테러 용의자의 소지품에서 대구 한 공장의 사원증과 대경교통카드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구의 공단에서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갑자기 해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규제하기는커녕 경찰과 국정원이 이슬람 사원에 방문하고, 수염을 기른 사람을 검문하는 등의 차별적인 단속을 진행했다.
한국 사회 공동체의 문제
무슬림에 대한 차별 해소와 인종․종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야 할 국가가 책임을 방기해 온 사이, 차별과 혐오는 특정한 반대 집단의 특수성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이슬람혐오는 갑작스러운 무슬림 등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여겨지거나, 무슬림의 수가 증가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슬람혐오가 개인적․제도적․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차별 문제로 인식되지 못한 결정적인 조건을 국가가 제공한 셈이다.
2012년에도 인천 남구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이 추진되자 기독교계와 주민들의 영향력을 의식한 인천 남구청은 주차대수가 부족하다는 얄팍한 핑계로 건축허가를 취소했다. 결국 2년 간의 법정 다툼으로 건축허가취소를 철회시켰지만 그만큼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온 무슬림들의 권리가 유보되고 훼손되었다.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 논쟁에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은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되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북구청이 주민들의 비난과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법원에 결정을 떠넘기는 대신, 이미 선주민과 상호작용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일상에 주목하면서 무슬림의 권리를 명확하게 선언하고 차별 없는 행정을 스스로 실행해야 한다. 대구시는 이슬람 사원을 건립한 다른 내부 지역에서 우려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반복되는 갈등구조를 중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현동 이슬람 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구나 권리를 가지고 차별 없이 함께 사는 세상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권리가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무슬림 당사자에게 있다는 인정이 국가와 지자체의 입장과 정책을 통해 확인될 필요가 있다.
무슬림들이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공존의 기술‘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들이 스스로를 권리 집단으로 기사화하려는 시도가 기존 사회를 흔드는 불협화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정체성과 특성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아니라 이해와 소통을 위한 사회적 자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회라면, 이해와 소통을 위한 장에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 역시 사회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