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10만 명의 국민동의청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지도 석 달이 되어간다. 하지만 국회는 여전히 법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지 않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의 원칙을 선언하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법이다. 만들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지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국회가 미루는 동안 시민들이 토론을 시작했다. 8월 중순부터 전국 16개 지역에서 ‘차별금지/평등법 제정을 위한 시민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21대 국회에는 4개의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어있다. 2020년 처음으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장혜영 의원 대표발의)과, 국민동의청원 이후 잇따라 발의된 ‘평등에 관한 법률안’(6.16.이상민 의원 대표발의, 8.9.박주민 의원 대표발의) 및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8.31.권인숙 의원 대표발의)이다.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은 동일하지만 조금씩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법에 담겨야 할 내용의 원칙과 방향을 밝히고 시민들과 함께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차별금지법, 차별 받은 사람의 말문을 틔우는 법
차별금지법은 “차별에 문제제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확장된 언어를 제공하는 법”이어야 한다. 우리는 차별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금지하는 일만 남은 것처럼. 그러나 차별이 사라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차별이 무엇인지, 무엇이 차별인지 알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저마다 차별 받았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흔한 기억은 ‘말문이 막히는’ 경험이다.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매우 화가 나거나 억울하지만 그 자리에서 차별이라고 항의하기 어려웠던 경험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는 차별 받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별로 없는 대신 차별을 정당화하는 핑계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말할 수 있는 통합적인 개념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 대체될 수 없는, 차별을 다루는 실체법으로서 차별금지법의 의의다.)
미국의 인종분리정책이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 기차 칸을 분리했지만 기차를 못 타게 한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를 분리했지만 교육을 못 받게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차별의 핑계가 되었다. 그러나 차별에 맞서는 오랜 투쟁의 결과로 우리는 ‘분리’가 차별임을 잘 알게 되었다. 이처럼 차별의 개념은 차별에 맞서 먼저 싸워온 이들의 언어가 역사적으로 쌓인 결과물이다.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 구별, 제한,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직접차별), “외견상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했으나 그 기준이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야기”(간접차별), “적대적, 모욕적 환경을 조성하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괴롭힘), 성희롱이 4개 법안 모두에 명시되어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런 차별의 개념에 비추어 한국사회에서 확립해온 차별의 판단 기준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기도 하다. 모집, 채용 광고시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나 제한을 표현하거나, 면접에서 직무와 관련 없는 정보를 요구하거나 질문을 하는 행위, 금융기관의 대출이나 보험 가입에서 제한하는 행위 등 이미 확인해온 차별 판단 기준을 후퇴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법안 제3장의 1절(고용), 2절(재화, 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3절(교육기관의 교육, 직업훈련), 4절(행정서비스 등의 제공이나 이용, 법령과 정책의 집행)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내용이 차별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논의할 과제가 남아있다. 이때 기존의 차별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조문 수정이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말하고, 정의로운 상태를 회복할 권리
차별 받은 사람이 말문이 트이더라도 모두가 차별에 항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별받은 사람들의 말하기를 어렵게 하는 여러 조건이 있다. 이런 조건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차별금지법에 담겨야 한다.
첫째, 공정한 토대에서 차별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차별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쪽에서 권력이 없는 쪽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별임금격차가 문제라는 걸 누구나 안다. 그러나 월급명세서만 받아보고서는 임금에 차별이 있다는 걸 알기가 어렵다. 차별에 관한 자료는 기업에 있다. 그래서 차별을 주장하려면 기업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정보를 확인한 결과 성별이나 학력에 따른 임금 차이가 있더라도 기업은 다른 핑계를 댈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차별을 다투려면, 기업의 정보공개 의무와 입증책임 배분이 필요하다. 차별이 아니라는 점을 기업에 입증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차별을 받았다고 진정하거나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 차별 피해자를 돕기 위한 증언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부당전보 당하거나 직위가 낮아진다거나 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많은 사람들은 차별을 당하고도 참고 넘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 차별을 주장하는 것은 사회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먼저 고발하는 공익제보이기도 하다. 차별 피해자와 조력자에 대한 불이익조치를 무효화할 수 있는 방안이 법에 포함되어야 한다.
셋째, 차별받은 사람들이 대응을 포기하는 또다른 이유는 ‘바뀔 것 같지 않아서’다. 용기를 내어 차별을 고발하고 투쟁하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포기하기 쉽다. 차별금지법은 차별 피해를 회복하고 유사한 차별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방안까지 담아야 한다. 차별받은 사람이 진정을 하거나 소송을 제기했을 때, 차별을 중지시키고 차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고, 차별을 시정하거나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방안은 시정권고, 시정명령, 소송지원, 적극적 조치 판결, 징벌적 손해배상 등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방안들이 한국사회에 현존하는 차별을 해소하고 재발을 막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담겨야 한다. 아울러, 국가와 지지체가 차별시정과 예방에 관한 기본계획을 세우고 시행하고 평가하도록 하는 의무를 두는 것도 차별금지법의 중요한 내용이다.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원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원칙은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07년 차별금지법은 7개의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함으로써 누군가를 ‘차별해도 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역설적으로 등장했다. 15년 가까운 싸움은, 누구도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인해온 과정이다. 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사유’라는 개념을 통해 차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속성 또는 집단을 드러낸다.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인종, 출신지역,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종교, 학력, 고용형태 등. 이러한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하는 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차별금지법, 이제는 만들자. 10만행동 이후 국회는 미적대지만, 시민들은 멈추지 않고 있다. 8월 30일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은 국회를 향해 오체투지를 시작했고, 9월 1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온라인농성을 시작했다. 코로나19로 모이기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의 요구를 이어가기 위한 투쟁이다. 온라인농성 준비는 쉽지 않았지만 온라인으로 모여서 사람들이 펼치는 차별과 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거스를 수 없게 바꾸고 있음을 느낀다. 2021년, 차별금지법 제정 안 될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