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토요일,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전국 방방곡곡의 분노와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대안이다”라는 의지가 <924 기후정의행진>으로 모였다. 당일 행사에 모인 인원이 자그마치 3만 5천여 명이라는 사실로부터, 이전까지는 그저 우연한 날씨 변화로 여겨졌던 기후 의제를 불평등의 지표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우리가 스스로 정의를 되찾아와야 한다’는 의지로 이어지기까지가 운동에 있어 가장 큰 고비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분명 각자의 자리에서 제각각의 사정이 있을 이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지구가 위험하다는 ‘기후위기’, 위험한 지구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기후재난’, 그리고 지구의 위험을 소수자에게 전가하는 주범이 있다는 ‘기후불평등’. 사실 나만 해도 이런 말들이 익숙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기후정의'는 커녕 기후 의제 자체를 깊게 고민한 적이 없었고, 그나마 의제와 친해질 기회라고는 사랑방 자원활동가 모임인 [노발대발]이 전부였다. 아직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사랑방에 들어온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신입활동가 교육의 일환으로서 [기후정의동맹]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 외에 기후 의제와 친해질 시간은 딱히 없었다.
그런 와중 행진 당일 사전집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기획된 <기후정의 오픈마이크>에서 발언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와 기후 의제가 왜 만나야 하고, 또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위기와 기후재난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피해 갈 수 없는 대중으로서, 기후불평등을 감각하고 폭로하는 당사자로서, 기후정의와 사회운동의 접점을 포착해야 하는 활동가로서 기후 의제를 고민한 끝에 완성된 발언문은 일종의 편지였다.
기후 의제는 불평등이 선명해지는 지점이자 다양한 운동의 주체들이 모일 수 있는 전장으로써 의미가 있지만, 나처럼 기후 의제가 여전히 낯선 이들에게는 기후라는 말로부터 ‘정치’를 상상하는 것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보통 기후라는 말을 들으면 ‘날씨’처럼 하늘이 만들어내는 자연 현상이 떠오르기 마련이었고, 이는 모두가, 비슷한 정도로,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 8월 폭우는 우리가 겪는 기후가 단순히 자연현상 혹은 자연재해라고 하기에 너무 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재난이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재난의 피해가 모두에게 ‘다 다르게’, 더 정확하게는 ‘불평등하게’ 나뉘었음을 선명하게 알게 해주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함께 모이게 된 건 누군가가 소외된, 다른 말로는 철저히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필연적인 ‘재난’의 경험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후 의제는 덥거나 춥고, 또 비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하는 자연 현상을 포함하여 부정의가 두드러지는 모든 ‘재난’이기도 했다. 기후재난으로 잃게 된 삶들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녔다. 위험한 노동 현장에 내몰리고, 매일 밤 퇴근길을 두려워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참으라’는 말을 주입 받고, 용기를 내서 피해를 증언하고 권리를 요구하면 ‘나중에’라는 말만 돌아오는 세상에서 밀려 나간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부정의'와 싸울 '정의'를 조직해내는 전장으로써 기후 의제와 만났다. 정의가 항상 전제로 하는 부정의, 즉 악당이라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자본주의’ 대신 오픈마이크 현장에 참석한 다양한 이들에게 최대한 쉽고 구체적으로 가닿길 바라며 ‘돈에 환장하는 악당’이라는 말을 넣었다. 자기 안방에서, 자기가 아닌 누군가, 가령 너와 나의 몸과 마음을 ‘착취’해서 돈을 버는. 누가 죽든 말든 돈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키득거리고, 우리가 죽는 걸 보면서 '왜 못 피했지?' '왜 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같은 무책임한 말을 던지고 안방으로 돌아가는 그런 ‘악당’들. 이 악당들이 곧 기후 불평등을 만들고 또 분배하는 부정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인식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평등과 정의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에는 위기에 빠진 우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구해주고, ‘악당’에게 빼앗긴 우리의 정의를 대신 찾아주는 그런 ’히어로‘는 없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지를 읽는 나를 쳐다보던 다양한 얼굴들로부터 느꼈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번 행진에서 만나게 된 반가운 얼굴들, 그리고 더 많은 새로운 얼굴들을 다음 행진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그사이 시간에 무엇을 채워나가야 할까. 일상을 이어가기에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이들에게 '내일'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제이기에, 선뜻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오늘'과 내일을 꿈꾸게 하는 '우리’, 이 둘만으로도 우리가 용기 내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느꼈던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