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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여기, 함께 살아가려는 우리가 있다

<용산참사 15주기 다크투어> 후기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줄여서 '다크투어')은 어두운 이면, 즉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억해야 하는 역사와 진실이 있는 특정 장소들을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이번 <'함께 기억하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힘이 되도록' : 용산참사 15주기 다크투어(이하 용산다크투어)>의 경로는 '용산역 / 용산역-서울드래곤시티호텔 구름다리 및 텐트촌 / 용산전자상가 / 한국마사회 용산 화상경마장(現장학관) / 용산정비창 / 땡땡거리 / 용산참사 현장'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울 용산역은 갈 때마다 길을 헤매게 된다. 지난 1월 20일, 용산다크투어를 가는 길에도 그랬다. 수도권 전철과 일반열차 및 고속열차가 여럿 모이는 용산역은 크기부터가 남달랐고, 더군다나 토요일 오후 시간대였으니 사람이 붐비는 건 당연했다. 다만 궁금했다. 이 인파 중 열차를 타러 온 사람이 많을지, 용산역에 뒤섞인 거대한 아이파크몰에 쇼핑하러 온 사람이 많을지. 아무튼 열차만 타러 온 나 같은 사람도 무언갈 구경하는 무리에 껴야만 할 것 같은 느낌만은 생생했던 기억이 난다.

 

돈을 위해 사람이 쫓겨난 자리

"여러분, 이 곳이 누구의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용산다크투어 경로의 시작점이었던 거기 용산역에서 공공교통네트워크 김상철 활동가가 던진 질문이었다. 누구의 것이긴, 응당 '이 곳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의 것이지 쉽게 답하려다가 이 곳에서 불청객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떠올랐다. 빠르게 떠나려는 열차의 속도를 '방해'한다며, 누구나 자리의 '값'을 치뤄야 한다는 곳에서 무료승차자로서 '혜택'만 누린다며, 열차 칸을 오가며 큰 소리로 물건을 팔아 '불편'하다며, 모두가 떠나는 장소에서 떠나지 않아 '민폐'라며 결국엔 내쫓기는 이들. 그럼 나는? 왜인지 백화점의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던 이 곳에서, 과연 나는 장소를 온전히 이용한다 자신할 수 있을까?

'민자역사', 한국철도공사(공기업)가 민간사업자에게 30년 간 점용을 허락해준 역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용산역은 HDC현대산업개발이 점용하는 민자역사다. 전체 면적 중에서 대합실·역무원 사무공간 등의 역무시설은 10% 이상이면 된다는 민자역사 규정 하에, 대한민국 내 가장 큰 민자역사(130,916㎡)인 용산역의 90%가 현대산업개발의 경영이익을 창출하는 장소로 개발 및 운영되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방 사무실에 나서며 항상 지났던 서울 영등포역도 마찬가지였다. 롯데쇼핑이 세운 영등포역 롯데백화점이 매년 5천억 원 안팎의 매출을 내는 알짜배기 사업장이라는 둥, 인천터미널과 이어진 백화점을 롯데쇼핑에 빼앗긴 신세계가 영등포역 재입찰에 각을 세우고 있다는 둥의 기사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역사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역의 ‘이용자’보다 역내 상업시설의 '소비자'라는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오지 않았을까.

돈을 위해 굴리는 장소에서 돈 없는 이들, 돈벌이가 안 되는 이들은 쫓겨났다. 홈리스행동 형진 활동가가 지난 사람사랑 후원인 인터뷰(2022년 11월 발행)에서 "3-4년 정도를 만났던 분들과 맺어온 관계가 한순간에 완전히 끊어지고, 어디로 가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보고 싶어 죽치고 앉아 수소문"했다던 바로 그 용산역 내 공중보행교(이하 구름다리)가 그랬다. 역 안팎을 오가는 이들 뿐 아니라 홈리스가 덥거나 추운 거리로부터 몸을 식히거나 데우려고 머물렀던, 다양한 좌판 노점상들이 자잘한 물건을 팔았던 그 구름다리는 2017년 서울드래곤시티호텔과 곧바로 연결되며 순식간에 변했다. 원래 공공의 몫이었던 구름다리의 관리 책임은 호텔로 넘어갔고, 다리 양쪽 입구에는 호텔 경비원이 배치되었다. 그렇게 호텔 이용자한테 방해된다는 이유로 홈리스도 노점상도 쫓아냈다. 지금은 내쫓긴 이들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낸 새로운 구름다리가 들어선 상태다.

용산전자상가 선인상가12동

막대한 자본력으로 장소를 사들여 개발하고 누군가를 내쫓는 민간의 폭력은, 이를 허락하고 부추기고선 '개인 간 계약'이니 자기는 책임이 없다며 나몰라라 하는 국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철거를 앞둔 용산전자상가는 "동북아 최대 전자산업단지"를 만들겠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구축되었다. 여기 전자상가로 청계천, 세운상가 등에서 컴퓨터와 전자업종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 지 어언 30-40년. 그렇게 다양한 부품 하나하나가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물건이 작동되듯, 다양한 업종의 상인들이 서로에게 기대며 일궈온 전자상가는 하나의 굳건한 공동체로 자리잡았다. 전자랜드, 원효상가, 나진상가, 선인상가… 왜 이런 곳의 공실률(건물 전체 방에서 입주가 되지 않은 방의 비율)이 꾸준히 오르고 있을까. 흔히들 원인이 산업 구조와 상거래 방식의 변화에 있다지만, 정부야말로 가장 강력한 원인제공자다. 다시금 이 곳을 '신산업 혁신거점'으로, 그리고 주변까지 싸그리 묶어 대규모 개발을 하겠다는 정부 계획이 상인들을 하나둘 내쫓고 있다. 돈벌이가 쏠쏠한 개발의 냄새를 맡은 한 사모펀드 기업은 나진상가 10개 동을 통째로 사들였다. "본 건물은 철거 후 재건축할 예정입니다"라고 적힌 큼지막한 현수막과 공사 가림막이 쳐진 채로 전기와 수도까지 끊긴 나진상가 12동에는 계악기간이 버젓이 남았음에도 퇴거 협박을 받는 상인들이 남아서 싸우고 있다. 15년 전 용산과 매우 닮은 풍경이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

2009년 1월 20일, 불에 휩싸인 용산구 남일당 건물 옥상에는 사람이 있었다. 레아호프, 삼호복집, 무교동낙지, 공화춘 중국집, 153당구장, 진보당 시계수리점, 한강지물포… 그저 휘몰아치는 재개발의 속도로부터 나와 우리의 일터이자 삶터를 지킬 길을 찾고 싶었던 용산4구역의 상가세입자들은 그 누구도 쫓겨나지 않는 한국사회를 꿈꾸며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건물에서 공화춘을 운영하던 아들과 함께 망루에 올랐던 레아호프 이상림 씨의 품에 있던 그을린 구청 공문. 보상협의체를 꾸릴 때까지 인허가를 미뤄달란 요청에 그저 "중단할 수 없다"던 용산구청의 답변은 망루로 오를 수밖에 없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동절기 철거 금지' 원칙에도 경찰 특공대가 점거농성 시작과 거의 동시에 배치됐고, 농성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진압을 위해 건물 안에 들이닥쳤고, 그렇게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특공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위로부터 진압 재촉이 내려왔다는 한 특공대원의 진술에도 검찰은 무전내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오히려 망루에 함께 올라온 동지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이들과 연대자들이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용산참사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다시금 나와 "폭력 저항이 용산참사의 본질"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세입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곤 대책 없이 쫓겨나거나 망루에 오르는 것 뿐이었던 '개발/강제퇴거의 폭력'과 세입자들의 저항을 짓누르고 지우려고만 했던 '국가의 폭력'이야말로 용산참사의 본질임을. "전광석화처럼, 질풍노도처럼 (개발을) 밀어붙여야 국민이 희망을 가진다. 전 국토가 마치 거대한 공사장처럼 보이게, 해머 소리를 빨리 들리게 해달라."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가 내뱉은 이 말 속 '국민’에 돈 없는 자들의 자리는 없다. 그럼 돈이 없어 쉽게 떠날 수 없는, 돈이 없어 결국엔 쫓겨나는, 그렇게 간소해진 살림살이를 챙겨 더욱 열악한 자리로 이동했다가 또 다시 쫓겨나는 이들의 자리는 대체 어디인가.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국가 스스로의 역할을 다시금 인정하는 것, 나아가 참사가 이어지지 않도록 회복과 재발방지의 책임을 지는 것과 맞닿아있다.

내가 사랑방에 없던 시절, 사랑방은 용산참사의 시간을 어떻게 겪었을까.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의 구성원이란 이유만으로 수배되었던 활동가, 진실을 외면하는 책임자를 국민의 자리에서 직접 밝히는 '용산국민법정'을 준비했던 활동가 모두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으로부터 '인권'을 끝없이 질문하고, 그로부터 '인권운동'의 역할을 무겁게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삶을 철거당하지 않을 권리, 평화롭게 생존할 권리가 개발/강제퇴거와 공권력에 짓눌렸던 용산(Y)참사의 장면은 이후 명분 없는 대규모 정리해고가 이뤄진 쌍용자동차(S) 평택공장, 해군기지건설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정마을(K), 탈송전탑과 탈핵(N)을 외쳤던 밀양에서도 반복됐다. 이들이 모여 "쫓겨나는 모든 생명이 하늘"이라 외쳤던 <SKYN 함께 살자 농성촌> 사진에서도 사랑방 옛 활동가의 얼굴이 보인다. 그렇게 함께 살아갈 자리를 함께 지키려던 싸움이 나를 포함한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여전한 과제임을 실감한다.

 

함께 살아가는 힘, 우리의 자리

‘함께 살아가는 힘’의 힌트를 얻었던 건 다름 아닌 용산역 홈리스 텐트촌이었다. 구름다리 양쪽에 길게 난 창문 너머로 텐트들이 보인다. 홈리스들이 내쫓김을 거듭한 끝에 찾은 그 땅은 철도정비창의 ‘것’이지만, 홈리스들이 거길 찾기 전에는 그저 방치된 땅에 불과했다. “용산구청은 텐트촌 당사자들이 개발예정지를 무단으로 불법점거했다고 하지만, 홈리스들은 그 누구보다 버려진 장소의 쓸모를 만들어온 사람들이거든요”라던 형진 활동가의 설명을 곱씹게 된다. 버려진 땅은 내쫓긴 사람들을 내쫓지 않았고, 내쫓긴 사람들은 버려진 땅의 쓸모를 되찾아주었다. 함께 살아내는 힘은 장소의 ‘새로운 쓸모’를,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힘이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 텐트촌 역시 퇴거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앞서 말한 용산역 내 새로운 구름다리가 텐트촌 일부를 가로지른다는 이유로 용산구청은 홈리스들에게 퇴거를 통보했다. 퇴거 이전에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에 "텐트 하나씩 새로 줬는데 못 받았냐"고 답한 용산구청의 한 태도에서, 사람/삶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보이지 않는다.

용산참사의 자리에는 전세가만 20억 원 안팎(2022년 기준)인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스퀘어'가 들어섰다. 주거빈곤율은 20%에 달하지만, 큰 돈 없는 무주택자에게 필요한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고작 3% 이하인 이 곳 용산에서 "어메이징 코리아"의 단면이 보인다. 사는 '곳'과 사는 '것' 사이, 한국사회의 집이 어디쯤 있을지 가늠되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오세훈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개발 사업으로 삶의 자리도 목숨도 잃었던 숱한 과거를 잊은 듯, 또다시 자신만의 조감도를 구현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다. 특히 본인의 <한강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에서 용산정비창을 국제업무지구로 개발하여 초고층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선포한 상황이다.

이 용산정비창 부지가 나의 것이라면, 함께하고 싶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나아가 이 곳이 우리의 것이라면, 함께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본다. 누구라도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기다란 벤치, 남녀 성별 표지판도 문턱도 없는 화장실, 다양한 신체가 함께 헤엄칠 수 있는 반신욕 깊이의 안전한 수영장이 있다면 좋겠다. '간병도 병'이라는 보험회사의 광고를 피해 서로를 돌보는 게 뿌듯함이 될 수 있도록 여유로운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발랄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용감하게 엉뚱한 친구와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게 무서운 내가 함께 곡을 만들 수 있다면. 따뜻한 밥과 물, 수건과 이불을 나눌 수 있다면. 비인간 동물, 식물과 새로운 깊이의 관계맺음을 피워낼 수 있다면. 무궁무진한 쓸모를 떠올릴수록 이 '곳'이 돈벌이만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욱 짙어진다. 

이 광활한 용산정비창 부지에서,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은 누구와 무엇을 하고픈지 궁금하다. (무려 51만2138㎡, 15만5000평 크기다!) 그걸 '함께' 상상하고, 현실로 '함께' 만들어나가는 일은 곧 우리가 용산참사를 '함께'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함께'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내는 길이기도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