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은 일 년에 한 번씩 반성폭력교육을 진행한다. ‘조직 내 성폭력 근절’이라는 좁은 범주를 넘어 성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조직적으로 살피고 고민하는 게 내가 이해하는 사랑방의 반성폭력교육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반성폭력위원회를 맡으며 주제를 고를 때 ‘성산업’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매매 여성에 대한 오랜 편견과 낙인에 맞설 논리가 필요했다. 윤석열 현 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부터 그의 배우자인 김건희가 줄곧 논란이 되어왔다. 김건희에 대한 비판 내지 비난은 '명품백', '성형' 등으로 곧잘 귀결되었고, 그 밑바탕에는 그가 과거에 성매매를 했다는 찌라시가 있었다. 자기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비윤리적이고 사치스러운 여성. 성매매를 도덕적 타락의 문제로 바라봤던 한국 특유의 성 보수주의가 낳은 이미지다. 단순히 ‘모든 성매매 여성이 그런 건 아니다(어떤 여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한다)’는 논리를 넘어 그러한 낙인이 어떤 다양한 편견들이 엮이며 만들어지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맥락 위에서 박탈당하고 지워진 권리 또한 보다 선명해질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작년부터 이어지는 파주 용주골의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강제집행과 함께 ‘성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이 과제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파주시는 ‘여성친화도시’를 내세우며 정작 집결지 여성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한겨울 꼭두새벽에도 그들의 일터이자 삶터인 건물들은 용역들에 의해 때려부수어졌다. 그들과 함께 ‘반인권적 강제철거’를 규탄하는 연대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성노동자’로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와 삶의 장소에서 함부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는 데 우려와 반발을 표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성매매 집결지는 여성에 대한 젠더 폭력이 응집된 장소로써 하루빨리 사라져야 하는 곳인데, 성매매를 ‘노동’으로서 자발적인 행위로 그리게 되면 여성의 피해(자)를 드러내며 성매매 집결지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톨의 자발성 없는 ‘순수한 피해자’만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한계적인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시선이 수십 년간 이어지는 데 대한 고민이 있다.
이 둘에 대한 답을 동시에 고민할 수 있게 해준 게 성매매를 ’산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성매매를 여성 개개인에 대한, 남성 개개인에 의한 해프닝으로 볼 게 아니라 여성(의 성)에 대한 착취가 거대한 산업으로서 구조적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이다.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빚을 쉽게 지게 하고 영원히 갚도록 부추기는 ‘금융 자본주의’하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성매매 과정으로 끌어들여진다. 반성폭력교육을 앞두고 사랑방 활동가끼리 『레이디 크레딧』이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점이다. (사전학습 책모임에 관한 후기는 지난호 사람사랑 활동이야기 “『레이디 크레딧』을 읽고 무릎을 '탁' 칩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8월 9일 금요일, ‘반성매매 운동의 쟁점과 고민(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성매매와 성산업을 중심으로)’을 주제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의 혜진 님을 모시고 반성폭력교육을 진행했다. 주요하게는 성매매 산업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를 꼼꼼히 살펴봤다. 어떤 산업이든 최대한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걸 목표로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선 더 많은 상품이 공급되고 또 끊임없이 소비/욕망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성산업에서 상품은 여성의 몸이다. 남성 권력, 사회가 여성들에게 원하는 특정한 몸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특정한 몸에 대한 남성의 욕구가 더 많이 부추겨지는 게 성산업의 기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초이스’라는 은어, 그리고 강남 일대에 줄지어 있는 성형외과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성매매 업소와 메이저급 성형외과들이 제휴를 맺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욕구도 디자인된다. 흔히 사치품으로 불리는 더 비싸고 좋은 물건들에 대한 갈망은 더 예쁘다(고 인정받)는 얼굴과 몸을 만들도록 부추겨지는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성매매를 금지하려는 법제도적 노력은 성매매를 여성의 도덕적 일탈 및 타락이 아닌 젠더 불평등한 구조에서의 피해로 볼 수 있게 한 점, 이를 통해 피해여성이 권리를 말할 수 있게 된 점에서 성취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권리가 무결함을 증명하는 법제도적 틀에 갇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외화벌이 등을 위해 국가에 의해 묵인되는 동시에 관리되어왔던 성매매는 유흥업소 종사자, 접객부와 같은 ‘합법적 행위자’의 영역을 끊임없이 만들어왔다. 동시에 집결지 폐쇄의 흐름이 생기며 오피스텔과 같은 공간에서 일대일로 이뤄지는 음지화된 성매매 형태가 많아지고 있다. 여성의 성(적 이미지)이 돈이 되는 산업을 성매매라고 한다면 이른바 ‘벗방’과 같은 인터넷 방송도 포함될 수 있을 테다. 집결지에 여성을 고정시키는 방식에 비해 자유로워진 성매매 환경은 그 자체로 성판매 여성을 단순 피해자로 호명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혜진 님과 질문과 토론을 이어가며 앞서 언급했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현재 여성운동에서 성매매 문제는 주로 성매매 집결지를 없애 성매매를 근절시키는 것, 그 과정에서 성판매 여성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성착취 피해를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듯하다. 혜진 님은 성매매를 성착취로만 명명할 때, 성매매가 젠더폭력이면서 생계유지수단이기도 한 현실이 가려진다는 우려를 했다. 생계니까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이게 성매매 여성들에게 생계로 작용하는 현실이 존재하기에 그들이 최저임금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의 문제이자 빈곤의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빈곤’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당장 손에 쥔 돈이 있는 상태냐 아니냐로 빈곤을 단순히 판가름할 수 있는가? 그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동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부터 탈락된다거나(어리거나 늙은, 정신질환 및 장애가 있는) 넓게 보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빈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 내 머리에 남은 성매매에 관한 고민은 ‘정의로운 전환’에 중심을 두고 있다.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탄소배출 주범으로서 석탄화력발전소가 지목되며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기후정의동맹은 그 과정에서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소외되며 피해를 오롯이 감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산업 전환 과정의 주체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바로 그 ‘정의로운 전환’이 성산업 구조 아래 반성매매 운동에도 필요한 관점은 아닐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가능해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다. 그 위에서 ‘성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도 이어진다. 단지 피해(자)로 호명하며 그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성매매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직접 주장하는 주체로 자리매기는 과정을, 스스로를 성노동자라고 칭하는 여성들이 이미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단지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에 답답해하는 걸 넘어 성매매 여성, 성노동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신경을 기울이며 고민을 이어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