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박철수/ 주연:황신혜, 방은진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일단 껌을 하나 까서 입 속에 넣었다. 하루 전에 먼저 이 영화를 본 친구가 충격적인 장면이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고, 가능하면 음식을 먹지 말고 가라고 했던 것이다.
결과를 미리 말하면 나는 껌을 그리 씹지 않았다. 대신 조금 울었다. 감독 스스로 ‘까십 시네마’라고 이름붙인 영화 <산부인과>는 일관된 줄거리를 띠고 있지는 않다. 상당히 진보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성격에 이혼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두 딸을 둔 기혼녀 한정연, 인정 많고 매사에 사려가 깊은 미혼녀 민혜석, 전혀 다른 성격의 이 두 사람은 산부인과를 지키는 전문의이자 자신들 역시 산부인과적 환부를 갖고 있는 잠재적 환자다. 두 의사는 옴니버스 식으로 이어지는 사연을 들어주고, 충고하고, 판단하고, 해결해 주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다.
산부인과에서는 시초를 다투어 생명이 태어나고,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갖가지 기가 막힌 사연들이 부산하게 뒤얽힌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기왕에 태어난 사람들은 첨예하게 갈등하기도 하고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하면 새로운 문제를 배태하기도 한다. 은밀한 불륜과 비열한 추행이 축복 받지 못한 생명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성을 남용하다가 생긴 생명을 공산품처럼 제거하려는 철면피나 철부지도 드나든다. 딸만 내리 낳은 임산부의 투신 위협이나, 천운이 있는 생시에 가문의 종손을 낳기 위해 출산 시간을 늦추려는 가련한 노력들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비애를 느끼게도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것이거나 생명과 삶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나 깊이를 가진 것은 아니다. 단지 요즘 만병통치제로 쓰이는 웃음에 절여져 다양하게 그리고 가볍게 나열되는데도 호쾌하게 웃을 수 없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또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관객을 향해 대사를 하거나, 핸드 헬드 카메라를 사용해 화면 구도를 불안정하게 연출하는 것 등도 그동안에 많이 답습된 기법들이라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아기의 머리가 자궁을 빠져나오는 자연 분만 장면이 서너 번, 직접 매스로 배를 가르고 기구로 헤집어 아이를 꺼내는 제왕절개 장면이 두 번이나 ‘여과 없이’ 나온 것은 친구의 말처럼 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껌을 씹게 하는 동시에 눈물이 솟게 하는 장면이었다. ‘짐승보다 더 무자비한 과정을 거쳐서 천부인권을 가진,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는 인간이 태어나는구나. 저렇게 태어나는데 어떻게 인간 사이에 높낮이가 있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큰 고통을 뚫고 태어나는 존엄한 벌거숭인데!’
아직 진행중인 장면 위로 스텝들의 이름이 씌어진 자막이 올라가고 영화는 또 한 번의 진부한,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 채 정지된다. 영화의 모든 것이 현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리라.
김경실(민주언론운동협의회 영화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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