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을 위한 80의 희생
독일통일 이후 동독국민들이 노동권 즉 노동할 권리가 없어진 사실에 가장 당혹해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노동권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지않다는 사실을 요즈음에야 새삼 절감하고 있다. 인권, 건강권 등과 같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기본적 권리조차 지켜지지않는 마당에 헌법에 명시되지도 않은 노동권을 운운하는 것은 과연 사치인가?
구조조정의 강행
국가부도 직전까지 가게된 현실을 개탄하는 복고적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지난 날 국가주도의 자본축적체제가 아시아적 가치로, 유교자본주의로 미화되면서 칭송되고 있다. 그리고 그간 저임금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산업예비군 창출을 통하여 이루어지던 노동력 관리 즉, 뒤집어 표현하면 실업에 대한 국가적 관리가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그마저 포기한 것에 대한 원망이 복고적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렇다! 실업자가 공식 추산으로 200만이 넘어서는 마당에도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흡수’하는 실업대책, 다시 말해서 눈앞의 실업증가는 불가피하지만 구조조정을 강행해 나가는 것이 정부의 실업대책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실업대책은 사회안전에 주안점을 둬야한다”는 재정경제부 장관의 상징적 발언 이외에 어떠한 실질적 실업대책을 갖고 있지 않다. ‘노숙자는 불결하다’, ‘노숙자가 병을 옮길 수 있다’는 등의 몇단계 홍보를 거치면서 ‘노숙자의 인권’이 사회안전을 위한 격리보다 우선할 수 없었다.
광풍은 끝나지 않았다
한차례의 구조조정 광풍이 휩쓸고 간 금융부문은 노동조합의 통계로 볼 때 생활수준이 12년전으로 하향되었다고 한다. 임금삭감, 복지축소를 감수하고도 3만여명의 노동자가 명예퇴직 또는 희망퇴직을 강제당했다. 산업부문 역시 예외가 아니다. 12월 초에 발표한 빅딜을 포함한 5대재벌 구조조정 방안대로라면 5대재벌의 58만 노동자의 20%이상인 11만에서 17만에 달하는 비주력업종 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예상된다. 최근 삼성자동차, 대우전자, LG반도체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 한 단면에 불과하며, 벌써 1만명 이상의 노동자를 내쫓은 현대그룹의 구조조정방안이 구체화되면서 2월 24일 기아와 현대의 자동차산업 12개 노동조합의 7만 노동자가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올 봄에 예정된 공공부문과 제2금융권 구조조정이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없다
정권과 자본의 구조조정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등의 외형적인 실업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기본권과 생존권의 전반적 후퇴라는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다. 한번도 정권과 자본에 의해서 주어져본 적이 없는 그리하여 투쟁으로 쟁취한 노동자 기본권과 생존권이 자본의 경쟁력과 효율성의 깃발아래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연봉제, 직급파괴, 계약제 확대 등으로 자본의 유연화 공세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으며, 정리해고의 칼날은 노동조합의 선진적 활동가를 겨누어 민주노조운동의 와해를 의도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해고된 자들의 몫까지 맡아야 하므로 노동강도는 강화되고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작은 정부’를 내세워 산업보건관련 감독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회사측은 노동조합의 안전보건관련 정보요청권, 각종 참여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단체협약 안으로 내놓고 있다. 김대중정부 출범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임금삭감에도 불구하고 복지비용은 축소되고 생계보조형 임금을 없애고 있다.
예고되는 투쟁
지난 연말 민주노총 이갑용위원장의 24일에 걸친 국회앞 단식투쟁 이후 선언한 노사정위원회 탈퇴 결의가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되면서, 다급해진 정부는 구속노동자 석방, 실직자 초기업단위 노조가입 허용, 민주노총 조기합법화, ‘노사정 협력증진 및 정책협의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한 노사정위원회 위상강화 등의 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80을 위해서 20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20을 위해서 80이 희생된 현실에서 더 이상 노사정위원회 참여는 무의미하며, 따라서 산업부문,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는 3월말 4월초에 총력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위한 투쟁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딱따구리의 우를 범하는가
‘딱따구리가 저 살자고 제 사는 나무를 죽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국민의 정부’ 1년에 IMF 들이밀고 자본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내세우며 나무를 죽이고 있다. 국민의 정부가 단지 의제적 국민통합 슬로건에 그친다면 즉 ‘노동자를 위한, 인간을 위한 구조조정’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를 거부한다면, 노동자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노동권을 포함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로서의 사회권의 획득을 위한 투쟁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시작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불가역성을 믿는다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후퇴라는 역사적 후퇴는 결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이종회(사회진보를 위한 연대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