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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복수노조 금지 족쇄에 묶인 노동자들 ①

유령이 지배하는 사업장


지난 2월 9일 단위사업장에서의 복수노조 금지 5년 연장안이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되었다.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될 경우, 이제껏 단결권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낮춰야 했던 노동자들은 또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복수노조 금지조항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싣는다. [편집자주]

"복수노조를 또 5년 유예시키겠다구요? 너무 심하단 생각 뿐예요." 삼성 에스원(세콤)의 전 직원 전명기 씨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 탓에 단결권 행사를 봉쇄당한 경험이 있던 그였기에 실망은 더 크다.

지난해 5월 24일 삼성 에스원 노동자들은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를 냈다. 외환 위기 이후 부당한 인사조처는 물론 상여금, 연·월차의 강제 반납 등에 줄곧 시달리던 때였다. 또 45살만 되면 회사의 강요에 밀려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들이었다.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됐고, 노조 가입자의 숫자가 며칠만에 3백72명에 달했다. 그런데 며칠 후 이들은 노조 설립이 좌절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측이 재빨리 '유령노조'를 만들어 노조 설립필증을 받고서는, 복수노조금지 조항으로 노동자들의 단결권 행사를 봉쇄한 것이었다.

"말로는 사무실도 갖췄다고 하지만, 노조란 게 조합원을 모으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회사쪽이 내세운 노조는 전혀 그런 건 없었어요. 말 그대로 유령이죠." 그 후 전 씨를 비롯해 처음에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5명은 사직을 강요당했고, 결국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삼성의 이런 수법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87년 8월 창원의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 신고조차 거부당했다. 노조를 만든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회사 쪽이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하루 먼저 접수시켰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지난해 11월 수원 삼성코닝 사내기업 노동자들이 같은 이유로 노조 설립에 실패했다.

또 삼성생명의 노조는 노조위원장도 있고 형식적이나마 대의원선거도 하지만 회사 편에 서서 노동자들을 나몰라라한다는 점에서 유령노조 못지 않다. 98년 1천7백명이 정리해고되는 과정에서 노조가 한 일이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노조위원장직이 출세의 지름길로만 여겨질 정도다.

한편, 삼성 에스원에서는 전 씨 등이 회사를 그만 둔 후에도 계속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회사가 계속 부당하게 나오니,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건 당연할 밖에요"라고 전명기 씨는 말한다. 하지만 '유령노조'가 있고, 복수노조 금지 조항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노조 설립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삼성생명에서 해고된 후 2년 째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성영주 씨는 잘라 말한다. "복수노조 금지 5년 연장은 무조건 저지해야죠." 노조를 민주화시키기 위해서든, 아님 제대로 된 노조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든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철폐는 기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