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와 '도리' 사이에서
며칠 전 어느 유명 영화감독은 신문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의 영화에 여성 비하적 장면이 많다고 지적하자, "나는 마마보이다.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데, 여성을 나쁘게 묘사할 리가 있겠냐?"고 정색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을 어머니(혹은 아내, 누이)와 동일시한다. 심지어 이 영화감독처럼 마마보이를 페미니스트 비슷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일 뿐이다. 그것도 남성의 편의에 입각한 성 역할이다(유관순이 누구의 관점에서 "누이"인가?)
모성과 같은 보살핌의 노동을 찬양하든 비하하든, 어머니의 역할은 인간이 이해 관계에 따라 만든 사회적 구조, 따라서 정치 제도일 뿐이다. 만일 우리의 상식대로 모성이 본능이라면, 어머니들은 절대로 뱃속의 여아를 살해할 리 없고 한국이 세계 최대의 아들 생산국도 아닐 것이며, 모든 모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미혼모가 차별 받지도 않을 것이다.
모성 본능 혹은 여성=어머니라는 논리는 노동권, 정치 참여 등 사회 생활 전 영역에 걸쳐서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합리적"으로 박탈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소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면, 남편에게 폭력 당하는 여성들이 자주 듣는 말은 "왜 벗어나지 못하느냐"이다. 그러나 동시에, 폭력 가정에서 탈출하려는 여성에게는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냐"고 비난한다.
학교 폭력이나 조직 폭력, 고문과 같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겐 이런 비난을 하지 않을 뿐더러, 같은 가정폭력이라 할지라도 노인학대나 아동학대의 경우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폭력을 당하지 않을 기본권이 있지만, 여성은 인간이기 이전에 어머니나 아내로 간주되기 때문에 '인간의 범주'에 속하기 어렵다.
여성이 폭력가정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보복의 두려움도 큰 이유지만, 아내로서 참아야 하는 '도리'가 인간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보다 우선 시 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이렇게 인권보다 '도리'를 지키며 오랫동안 폭력을 견디다 보면, 결국은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여 살인에 이르게 된다(미국의 경우 살해당한 여성들의 42%는 전현직? 애인, 남편에 의한 것이며, 임신 중 남편의 구타가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원인이다. 미국보다 여성관련법, 복지시설이 훨씬 미비한 한국은?)
그러나 이 경우는 대개 살인이 아니라 아내의 자살이나 과실 치사 등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반대로 가정폭력 피해여성이 정당 방위로 가해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는 91년 남00씨 사건을 시작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집안 일", "실수(과실치사)"이고, 이에 대한 아내의 자기 방어는 "살인"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은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정폭력과 여성인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