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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2)

태극기 흔드는 민간인 향한 미군의 '익산역 폭격'


지난 11일 낮 뜨거운 햇볕으로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전북 익산역 철로를 허리가 구부러진 '꼬부랑' 할머니, 최요지 씨가 지팡이를 짚은 채 위태롭게 가로지른다. 최 씨가 멈춰 선 곳은 익산역 철로 건너편 귀퉁이에 있는 비석 앞. 이 비석은 한국전쟁 중이던 52년 전 7월 11일 미군의 익산역(당시 이리역) 폭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최 씨 역시 당시 익산역에서 일하던 남편을 미군의 폭격으로 잃었다.

1950년 7월 11일 당시 익산은 접전 지역으로부터 거리가 떨어져 평온한 일상이 유지되고 있었다. 남성중학교와 이리여중에 다니던 학생들은 한 국회의원의 시국강연에 동원돼 이리극장을 메웠고, 평화동 변전소 부근에선 우시장이 열려 전주·김제·만경·임피·오산 등지에서 온 사람들로 분주했다. 징병 소집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이 군 입대를 위해 익산역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익산역 직원들은 전시 상황이라 비상 대기 중이었다.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미공군 폭격기 'B-29' 2대가 익산역 위에 나타났을 때 기관사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미군기를 환영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미군 폭격기는 익산역과 주변의 송학동 민가에 수십 발의 폭격을 가했다. 익산역 일대는 화염과 폭음에 휩싸였다. 이윽고 미군 폭격기는 폭격에 놀란 사람들과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달아나던 변전소와 전라선 철길 주변을 향해 폭격을 퍼부었다.

또 나흘 후인 7월 15일 미공군 소속 전투기 4대가 익산역 상공에 나타나 민간인들을 향해 30∼40분 간 로켓포를 쏘고 기총소사를 가해 또다시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죽었다.
이는 익산시의회 청원심사특별위원회가 지난 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당시 16살이었던 익산폭격 희생자 유족회의 이창근 회장은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이 회장은 "'꽝'하는 소리를 듣고 학교에서 뛰어나가 송학동 쪽으로 가 보니, 집은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에서 근무 중이던 아버지의 시신을 철도역 구내에서 수많은 시체들 가운데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강재주 할머니는 당시 남동생 셋을 잃었다. 이리극장에 간 두 동생은 폭격을 피해 도망가다 죽고, 막내 동생은 역에 나가 놀다 죽었다고 했다.

익산시의회가 피해자 신고 접수를 받아 2001년 말까지 파악한 익산폭격 사건의 희생자 수는 철도청 직원 54명, 민간인 40명으로 모두 94명이다. 그러나 이는 가족에 의해 신고된 희생자의 숫자일 뿐, 익산시의회 보고서는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정부와 철도청의 공식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망자는 신원미상을 포함해 약 3백5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밝힌다. 또 이 회장은 익산역 구내에서만 80여 구의 시신을 봤고, 송학동 주민 50여명, 철도관사 주민 30여명, 시국강연에 동원됐던 학생 30여명, 또 군입대를 위해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 2백여 명 가량이 죽었다고 보면 실제 희생자 수는 4백여 명에 이를 거라고 추정했다.

그나마 익산에선 시의회 차원의 조사가 진행됐다는 점이 다른 민간인 학살 현장과 달리 두드러지는 성과다.

오랜 침묵 끝에 지난 99년 10월 11일 송현섭 국회의원이 철도청 국정 감사 과정에서 익산역 폭격 사건에 대해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익산역 폭격사건 진상규명 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 회장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좌경 세력으로 몰리니까, 50년 동안은 입 다물고 살아왔다"라고 말한다.

99년 10월 26일 구성된 '익산폭격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와 희생자 유족회는 미군의 익산폭격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청와대·미대사관·국회·익산시의회 등을 쫓아다녔다.

익산역 앞 광장에 익산폭격 민간인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진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익산역·철도청·건설교통부와의 오랜 실랑이 끝에 부지가 확정됐고 익산시의회를 점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엔 익산시와 시민단체 공동의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어 2000년 5월 30일 이창근 유족회 회장은 주한 미부대사를 만나게 된다. 당시 미부대사는 '익산폭격은 한국전에 처음 참전한 미공군 조종사가 지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오폭한 것'이란 요지의 말을 했다. 이에 이 회장은 '어떻게 한 차례도 아니고 세차례나 오폭을 할 수 있냐'라며 '진정 오폭이었다면 그 진실을 명백히 밝히고 유가족에게 배상하라'고 요구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1월 한국의 국방군사연구소가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공문 역시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2001년 9월엔 익산시의회가 '익산역 폭격사건 청원심사 특별위원회(위원장 손영환, 아래 특별위원회)'를 구성, 민간인 학살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기초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미국 정부기관들을 상대로 자료 수집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목격자들의 증언과 철도청의 자료를 토대로 조사를 벌여, 특별위원회는 지난 2월 '한국전쟁 당시 익산역 폭격사건 청원심사 결과보고서'를 발간했다.

특별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정부나 한국정부 그 누구도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고 있다"라며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나아가 특별위원회는 국회와 각 정당 등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을 조속히 제정하라는 입법건의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정부, 미국정부, 국회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응답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