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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운동사랑방 10돌 특집> 활동가들의 회상과 다짐

10년의 길 위에 '진보적 인권운동'의 푯대를 세운다


돌아보면 10년, 적지 않은 세월의 길을 걸어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1992년 하반기, 우리의 실험은 시작되었습니다. 전문화된 새로운 인권운동의 길을 모색하던 당시의 인권운동가들에게 우리 사회의 진보운동은 어떤 지지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비난과 그에 따른 외면 속에서 준비기에 벌써 '아직은 때가 이르므로 우리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패배감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해 겨울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하루종일 전화 한 통화도 없던 사무실을 쓸쓸히 지키며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고 세상 사람들이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취해 일순간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접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인권이론은 접해보지도 못했던 인권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공개강좌를 진행했고, 그 해 여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했고, 활동가 1명이 경찰 공안사건에 휘말리는 등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 해 9월 7일, 당시로는 최첨단 매체였던 일간 인권 팩스신문을 창간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실현하지 못했지만, '인권운동의 전문화, 대중화, 국제화'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그렇게 인권운동사랑방은 창립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속된 정치범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사업만이 인권운동의 전부라 여기고 인권운동의 지향과 역동성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도 없이 인권운동을 체제내적이고 개량적인 운동이라고 매도할 때, 그리하여 우리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이해보다는 비난을 앞세울 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인권상황도 많이 변했고, 사무실도 인권교육이다, 영화제다, 기획사업이다, 감옥사업이다, 연대사업이다 참으로 많은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우리가 걸어온 길은 곧고 평탄한 대로가 아니었고, 잘 짜여진 사업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준식 전 대표와 활동가들의 인권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 빛나는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에돌아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직함, 막연하나마 세상의 진보에 인권운동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텨온 1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조직의 위기도 몇 번 넘기면서 이제는 대표도 사무국장도 없이 활동가들이 동등하게 조직을 책임지는 활동가 중심의 조직으로 세워냈습니다. 적지 않은 자원활동가들이 꾸준히 결합해주었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후원자들이 정성을 보태주었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 이제는 인권운동의 진보이론을 생산해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인권운동연구소의 설립을 통해 실현해가고 있습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주장했던 일들이 많이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함께 해왔던 많은 단체들과 열악한 형편에도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활동가의 열정이 있었기에 국가인권위원회도 들어섰고, 사회권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소수자들의 관점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토록 외롭게 주장하던 '말'들이 세상의 변화와 함께 구체적인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10년 전과는 사뭇 다른 이 사회의 현상을 볼 때 우리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실감하며, 그 앞에서 그동안의 고통도, 절망도, 갈등도 모두 눈 녹듯이 씻겨 내립니다.

그러나 회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성장했고 발전했으나, 새로운 인권피해자들은 꾸준히 생겨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며, 함께 일했던 많은 이들이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보다 치열하게 보다 유연하게 우리가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리의 정당한 투쟁이 때로는 고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10년의 길을 걸어온 이 자리, 다시 먼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느것 하나 만족스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잘 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인권운동의 방향이, 그리고 우리 사회 성원 모두의 인권이 향상되고 증진되는 일에 다시 나서야 합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고, 어제까지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가 이제는 제도정치의 일원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끝내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으려 합니다. 제도로부터 배제되고, 그나마 마련돼있는 인권보장체계로부터도 소외받는 이웃이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인권의 이름으로 인간의 소중한 권리들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걸어온 10년의 이 길 위에 다시 '진보적 인권운동'의 푯대를 세웁니다.

인간사회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미친 헛소리가 아닌 바에야 이에 헌신하는 인권운동의 길을 우리는 다시 묵묵히 떠나겠습니다. 지금까지 얻은 '영광'을 뒤로하고, 보다 겸허하게 우리는 피해자들 곁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내려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압니다.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반대하며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는 진정한 진보의 세상을 인권의 이름으로 건설하는 길에 다시 우리를 헌신하렵니다. 그 길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밑거름이 된다면, 그리고 그 운동에 우리 인권운동사랑방 성원들이 쓰여진다면 아무런 흔들림없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10년의 세월을 지켜봐주셨고, 이끌어주셨고, 밀어주셨던 많은 분들께 지난 10년의 영광을 돌리고, 다시 상처만이 남을지 모를 그 '영광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그 길을 닦음으로써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인권운동사랑방이 되겠습니다.


창립 10돌을 맞이하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