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범죄의 가해자들 손에 범죄의 진상규명을 맡겨둘 수 있을까. 지난 10일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민간인학살 관련 통합법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100만 민간인들의 원혼을 씻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에는 국방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하도록 하고 있어 그 동안 대통령 직속의 독립 위원회의 설치를 주장해 왔던 유족들과 사회단체들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민간인학살의 직접적 책임자이기도 한 국방부는 그 동안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의 제정을 계속 지연시켜 왔을 뿐 아니라, 이번 법안 처리 과정에서도 법 제정 자체를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국무총리 산하에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고집해 왔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아래 범국민위) 이창수 입법쟁취위원장은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상태에서는 2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진상규명위원회에 국방부 소속 공무원들이 위원으로 참여할 것이 분명하다"고 예견했다.
이에 따라 범국민위는 지난 11일 성명을 내어 "진상규명은 가해자로 의심되는 세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독립적인 권한이 있는 독자 기관이 구성되어야만 가능하다"며 국무총리 산하 기구를 고집하며 진상규명의 진의를 훼손하려든 국방부를 강력히 규탄했다. 171개 인권사회단체들도 12일 성명서를 통해 "국방부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기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군이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 그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도 없이 또다시 피해자와 그 유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적극 동참하고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라"고 촉구했다.
'제주4·3 진상규명 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사무처장은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된 위원회에서 인권의식을 갖고 진상조사를 벌일 위원들이 선임될지 의문스럽다"고 입장을 피력했다. 4·3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독립적이지 못한 위원회가 설치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상황을 외면하고 민과 관의 균형논리를 강조할 가능성이 높으며, 나아가 군·경의 책임자들이 가해자로 구체적으로 거론되면 오히려 진상조사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15일 과거사특위 전체회의에 회부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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