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목숨이 끊어질 듯한 극도의 공포를 체험한 고문피해자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인권단체연석회의는 16일 국회도서관에서 고문·용공조작 피해자들을 모아 공안당국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의 진상을 파헤쳤다.
과거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간첩사건을 '조작'했다. 조작기술이 곧 고문기술이라고 할 정도로 '조작간첩사건'을 만들어내는 마이더스 손은 바로 고문이다. 이른바 '진도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석달윤 씨도 고문의 괴력으로 '간첩'이 되었다. 석 씨는 1980년 8월 21일 중앙정보부에 영장도 없이 연행되어 무려 47일 동안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 '간첩'임을 강요받았다. 고문수사관들은 '전신구타' '잠안재우기' '통닭구이' '성기고문' '물고문' 등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고 그 결과 국가보안법과 형법을 위반한 '간첩'으로 둔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무려 18년 동안 실형을 살았다. 석 씨를 대신해 증언한 아들 권호 씨는 복받쳐 오는 울분을 억누르면서 아버지가 당한 고문의 충격을 전했고 객석은 목젖으로 뜨겁게 올라오는 강한 분노와 함께 비탄의 눈물을 쏟아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검찰로 옮겨지면 공소사실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밝히며 검사에게 '정의'를 신원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협박의 연속일 뿐이다. 1980년 2월 25일 불법 연행되어 무려 78일 동안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한 신귀영 씨는 검사에게 공소사실을 부인해지만 담당 검사에게 "다시 끌고 가서 고문한다"고 협박당했다. 석 씨 역시 검사에게 고문사실을 알렸지만 공안 검사 변진우는 중앙정보부의 의견서를 바닥에 던지며 "이 사람 다시 정보부로 보내"라고 명령했다는 것. 이미 고문의 지옥을 경험한 이들은 이쯤되면 공포에 질려 모든 혐의를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
용공조작 사건은 사법부의 엉터리 재판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전창일 씨는 "이 사건은 검찰의 공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오자까지 똑같다"고 분개하며 "법정 기록마저 날조하고 그것을 근거로 대법원이 판결하는 나라가 있을 수 있냐"고 수 십년 전의 분노를 다시 토해냈다. 실제로 의문사위는 당시 검찰이 이들의 죄목인 '반국가 단체 결성'의 증거를 내놓지 못한 반면 재판부가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과 증거를 이유 없이 기각했다고 진실을 밝혀낸 바 있다. 고문에 의해 일사천리로 대법원까지 진행된 재판은 판결 17시간만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어 국제사법사에 '암흑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고문 피해는 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93년 남매간첩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삼석 씨는 지금도 '160번 수사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수사 받던 김 씨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데 '160번 수사관'이 다가와 칫솔로 성기 크기를 재어보는 등 성적 모욕을 준 것. 김 씨는 11년 전이지만 당시의 수치와 모욕이 너무 극심해서 그 수사관의 생김새, 표정, 몸짓, 말투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고문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다. 1990년 노동해방문학사건의 피해자 이원혜 씨도 '뺨 때리기' '잠안재우기' 등과 함께 폭언, 특히 사적인 편지 등을 가져와 빈정거리고 모욕을 줄 때는 참을 수 없었다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놨다.
한편 사법부가 이들에게 진실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신 씨는 이미 두 차례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으며(인권하루소식 2679호 참조), 석 씨 역시 1993년 고문 수사관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87년 10월에 공소시효 만료되었다고 기각했다.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