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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박숙경의 인권이야기] '탈시설'이 두려운 이유

얼마 전 한시적으로 시행되던 미신고시설양성화정책이 완료됨에 따라 '조건부 신고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공대위'의 명칭과 조직을 개편하기 위한 회의에 참여했다. 시설공대위의 활동을 평가하고 이후 활동방향을 세우려던 자리에서 새로운 명칭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새로운 명칭을 '탈시설연대'로 정하자는 의견과 '사회복지생활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로 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치열한 논쟁과 투표를 거쳐 '사회복지생활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로 정해졌다. 나는 '탈시설연대'로 하자는데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탈시설연대'라는 이름이 시설생활인의 가족, 시설종사자, 시설에서 생활하는 당사자들이 참여하는데 두려움과 오해를 줄 수 있으며 불필요한 논쟁에 소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설을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삶을 살자는 의미의 '탈시설'은 궁극에 이루어야 할 선명한 목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시설생활인 인권확보 운동에 참여해오면서 '탈시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두려움의 깊이는 어느새 활동가들이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럽게 만들어왔다. 그러나 '탈시설'이라는 용어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사회복지계에서는 공공연하게 사용되어져온 식상할 만큼 익숙한 용어이며 이미 많은 국가들이 '탈시설정책'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미신고시설양성화정책에 대한 문제제기과정에서 정부에 '탈시설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할 때면 여지없이 '탈시설'에 대한 논쟁의 늪으로 빠져들곤 했다. 마치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는 문고리를 만진 것처럼 정부의 관료들은 화들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탈시설'이 얼마나 이상적이며 현실적으로 먼 이야기인지를 강변하곤 한다. 그리고 마치 길들여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시설을 나와 지역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탈시설'이 엄청난 예산을 필요로 할 것이며 시설생활인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정부가 쓸 수 없으니 '탈시설'은 가능성이 없다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새로운 신규시설을 짓거나 기존의 시설들을 검증절차조차 없이 신고시설로 전환해서 지원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미신고시설양성화정책에 의해 1천억원 이상의 복권기금을 끌어다 쓰면서 장애인자립생활지원 예산의 거의 전부가 잘려나갔다. 복지부는 2006년 장애인생활시설을 짓기 위해 395억원의 예산을 책정하면서 장애인자립생활지원을 위해서는 겨우 6억원을 책정했을 뿐이다.

사회복지생활시설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서 툴리라는 학자는 사회복지생활시설의 가장 큰 특성의 하나로 '자기 영속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설의 자기영속성'은 일단 시설이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 자체가 영속성을 갖게 되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 경험을 더하자면 사회복지생활시설은 자기영속성과 함께 번식도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동안 시설조사과정에서 만난 시설장의 대부분은 시설을 늘려나가고 규모를 키우길 원하고 있었으며 가족이나 주변사람 심지어는 생활인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신규시설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해 복지부와 함께 민관합동으로 실시한 '미전환미신고시설 인권실태조사'와 '양성화된 장애인 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실태조사'에서 만난 생활인들은 하나같이 조그마한 대안만 있어도 그곳을 나가고 싶어 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시설을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생활시설에서의 인권침해에는 분노하면서 시설을 없애자는 데는 소극적인 가족과 종사자와 시민들.

'탈시설'에 대한 두려움의 이유! 난 그게 돈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알림] 이번주부터 인권이야기 필진이 새롭게 바뀝니다.

박숙경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 활동가)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송유나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사무처장) 정태욱 (영남대 법학교수)
덧붙임

박숙경 님은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