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장판을 깔고 두꺼운 이불을 꺼내고 올해 유행하는 뽁뽁이를 창문에 붙이며 월동준비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효과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다 붙였다는 사실로도 흡족합니다. 그런데 겨울을 준비하면서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일단락되길 바라는 문제들은 끝나지는 않고 오히려 새로 생겨나기까지 하는 쌍차, 밀양, 전교조, 공항공사 등등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분노의 감정이 밀려오곤 합니다.
그런데 이 분노는 어떤 발생된 문제에서 비롯되지 않고 원초적인 부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추위에 약하고 더위에 강해서 인지 여름에 집회와 시위에 참여할 때 생기는 분노는 그 이슈로 인해 생기는 저들과 싸워야한다는 마음과 동시에 생기는 분노의 감정이라면 겨울 분노는 정말 단순히 추워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가 더 화를 내고 저를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은 후자란 점입니다. 최근에도 골든브릿지 사옥 앞에서 집회에 갔을 때 ‘이상준 같은 인물 때문에 내가 이 추운 날 이렇게 덜덜 떨어야 하다니’라는 생각이 더욱 불같은 화를 불러오는 것이죠. 추위에 고생 할 땐 구호 한 번, 노래 한 소절 에도 더욱 분노를 담아낸달까요?
제가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길 하게 된 이유는 요즘 주위 친구들과 진로 고민을 이야기하게 되면서 빠져드는 무력감 속에서 문득 저런 사소한 감정이 어떤 결정을 하는데 계기를 제공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로 고민이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라면 저에게 중요한 고민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 것인지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의 무엇은 뭐든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위는 모두들 자신의 길을 결정하고 나아가고 있어 보일 때 저 스스로는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단 결론이 쉽게 나오진 않고, 공부에 대단한 뜻을 품지 않고도 학위 공부를 할 수 있듯, 진로에 대한 고민 역시 대단한 무엇을 찾아야 한다보다는 그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같은 고민이고 결정의 계기는 그저 사소한 감정의 변화 같은 일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생긴 거죠.
얼마 전 뒤늦게 ‘파주’라는 영화를 봤는데 주인공에게 넌 그 일을 왜하느냐고 했을 때 그냥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고 지금은 그냥 이란 식으로 대답을 하는데 딱 지금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학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런 고민이 처음이라 어색한 게 당연 할 뿐 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랑방에서 자원 활동을 5년이나 계속 해온 것도 추운데 계속 집회나 시위를 할 일이 생기도록 하는 저들에 대한 분노가 동력으로 작용해왔던 것이 상당합니다. 그래도 후회보단 잘한 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선택의 과정을 좀 더 확장시켜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도 적용해서 사소한 마음이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제 친구들처럼 먼저 고민해서 내린 결정도 천직을 찾는 건 어려운데, 혹시 천직을 딱 골라낼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끝나가는 학교생활에 대한 초조함은 졸업식 날 가족들과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으러 갈지에 대한 고민 정도로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의욕과 사명감이 넘치던 저란 인간이 이제는 사명감 자체를 잊어버려 난처해야하나 자문하는 상황에서 진로를 선택할 때 딱히 이유가 없는 것이 별 다른 흠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 맘을 늘어놓는단 것이 너무 구구절절 썼네요. 그래도 친구들 중 몇몇이 진로로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을 보다보니 알게 모르게 시름이 깊어가는 제 모습을 보며 ‘아 뭘 선택해도 그 이유 한마디는 생각해 둬야 될 텐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자원 활동가의 편지가 그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하던 친구들과도 이제는 혼자 시름시름하지 않고 제 나름의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만두만 15년씩 먹을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말이죠.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