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좋아했던 웹툰 중에 ‘은주의 방’이라는 네이버 웹툰이 있다. 지저분한 자취방에서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가던 백수 은주가 어느 날 셀프 인테리어에 눈을 뜨고, 자신의 집은 물론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의 공간까지 바꿔주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렸던 삶의 활력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몇 년 전 ‘은주의 방’이 내게 남긴 건 일말의 기대가 섞인 질문이었다. 공간이 바뀌면 그곳에 사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달라질까? 좋은 집에서 살면 정말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한참 내가 서울에 나가 독립해 살고 있을 적에 부모님과 동생들이 살고 있는 본가를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할 때가 많았다. 그동안 살았던 집중에서 제일 괜찮은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본가도 빌라의 반지층에 있는 탓에 공기가 습해서 곰팡이가 사시사철 피었다. 여름엔 장마철 습기에 속수무책이라서, 겨울엔 날이 추워서 결로가 심해서, 다른 계절엔 어차피 또 필 거 매번 지울 생각은 들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방 세 개를 두고도, 두 개의 방은 곰팡이 때문에 쓰지를 못 해서 부모님은 거실에 나와서 잠을 잤다. 어디에 있든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끔씩 본가에서 자고 갈 때마다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집도, 이곳에서 우리가 무력하게 방치하고 있는 불편한 일상도 싹 다 뜯고 치우고 바꿔버리고 말거라고.
희한하게도 올해 봄을 기점으로 각자 따로 나가살던 딸들이 하나, 둘 본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세달 전쯤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에 걸쳐서 집안의 도배를 다시 했다. 벽지 뜯기, 곰팡이 제거, 항균 페인트, 곰팡이 방지제, 6mm 단열벽지 등등 큰 공사 안 하고 비용을 덜 들이는 한에서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공간을 모두 제대로 쓸 수 있도록 가구배치를 전부 바꾸고, 깔끔해 보이도록 모든 짐 수납을 다시 했다. 화장실, 베란다, 싱크대, 창문틀 등등 차례대로 묵은 청소들을 꾸준히 했다. 동생들이 큰 언니 취미는 ‘집 정리’라고 할 정도로 한동안은 눈 뜨면 ‘오늘은 어디를 치울까?’만 생각했던 것 같다.
백일. 곰도 백일 밤낮이면 쑥과 마늘만 먹는 고행 끝에 인간이 된다. 우리 집도 백일 간의 집착 어린 보살핌 끝에 아빠피셜 ‘집이 많이 예뻐졌네’라고 할 만큼 괜찮아졌다. 하도 매일 같이 청소하다보니 동생들도 물건을 제 자리에 두기 시작했다. ‘우와. 다들 뭐가 더 편한지 알게 되고, 같이 시간을 가지니까 변하긴 하는구나. 이제 다 됐구나! 하면 되네!’ 겨우 자리 잡은 이 집에서 다 같이 오래오래 살면 좋겠다고 부푼 마음으로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8월 마지막 주, 태풍이 온다고 했을 때도 안 오던 비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 어마어마하게.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이 바로 지난번 노란리본인권모임에 참여한 내가 모두에게 신나게 떠들었던 바로 그 이야기다. 우리 집은 산 바로 아래에 있고, 너무 많이 비가 온 탓에 산에서 쓸려 내려온 흙이나 밤송이 무더기 때문에 하수구가 막혀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밤 열두시가 넘어서 우리 집 베란다 창문의 턱 끝까지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의 기분이란... 무슨 공포영화 보는 줄 알았다. 하필 반지층이라 지대가 너무 낮은 게 문제였다. 2층이나 3층만 되도 침수 걱정까지는 안 해도 됐을 걸. 그렇게 낮은 집인데다가 산 바로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산사태가 무서워서 잠을 못 잔 건 처음이었다.
다행히 동생들이랑 생난리를 쳐가며 하수구에 낀 나뭇가지들을 고무장갑 낀 손으로 다 빼내고, 구멍을 다시 뚫은 덕분에 별 일은 없었다. 그 부근에 차올랐던 물이 순식간에 하수구 아래로 빠져나갔고, 거실 바닥에 흥건해진 물을 밤새 퍼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가슴 속 깊이 느꼈던 막막함도 천천히 사라져갔다. 남은 건 헛웃음이었다.
웃겼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아찔한 추억거리 하나 생겼구나, 또 하나는 이 집은 결국 안 되겠구나. 집 안만 살기 좋게 바꾸면 될 줄 알았는데, 그 집이 서있는 기반이 이미 불안정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건 가족끼리 모여서 씩씩하게 벽지를 다시 바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어떻게 구축할까 등등의 얘기를 같이 나누면서 그날 밤 일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산사태가 날까봐 잠 못 들었던 그 밤에 구청은 대체 뭘 했나. 언론에서 역대급 폭우라고 호들갑 떨던 며칠 간 낮은 곳의 집들이 실제로 물에 잠길 때까지 정부는 긴급문자 보내는 것 말고 왜 아무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나. 사실 따지고 들자면 이렇게 취약한 지대에 아무 방비도 없이 건물을 짓고, 반지하처럼 있어선 안 될 건축 형태를 허용하고, 평상시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재해를 예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하나의 방이라고 해보자. 사람들은 시꺼멓게 곰팡이가 핀 사방의 벽을 보면서도 본 체 만 체 자기 할 일만을 한다. 그 불길하고 위험한 공기가 언제나 우리의 폐부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그저 무력하게.
앞으로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같이 나누게 될지 다 알지는 못 한다. 적어도 침수 위험이 있는 반지하 방에서 셀프 인테리어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더 안심하고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일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