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주변 사람들 생일도 잘 챙기지 않는 편인데 세계인권선언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게 되었어요. “불온한 세상을 향해 인권을 외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인권운동더하기와 여러 단체들이 함께 인권 주간을 진행했습니다. 인권을 이야기하는데 날짜가 중요하진 않을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 채택일이라고 해서 인권이 더 중요해지거나 잘 들리게 되지도 않을 테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12월 10일을 맞아 ‘불온한 세상을 향해 인권을 외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꼭 축하해야 해?”
“세계인권선언 채택 70년이 기념하고 축하할 일이야?” 인권 주간이 제안된 첫 번째 회의에서 누군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12월 10일 즈음에 기자회견이나 집회 등을 진행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지자체나 정부부처에서 너나할 것 없이 기념식을 열 텐데 행사 하나를 더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은 고민도 있었고, 세계인권선언의 의미는 사라진 채 축하와 기념만 남은 ‘기념식’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7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세계인권선언을 이야기한다면, 그저 지나간 세월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세계인권선언이 가지는 의미를 나누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정권이 바뀌고 좋아졌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요.
‘불온한 세상을 향해’
급변하는 시대 한가운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간의 분단과 적대가 해소되기 시작했고, 삼성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나 쌍용자동차와 KTX 승무원 해고자 문제처럼 오래된 문제들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하며 시작한 정부는 실제로 예년 대비 높은 폭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있고,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노동시간 단축도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국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로 그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올해 기소, 구속된 사람도 있었고요. 삼성은 반도체 직업병에 대해서 사과했지만 그래서 정작 반도체 공장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기업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와 KTX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결정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이야기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많이 받은 사안’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면서 한 편으로는 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해 임금 상승폭을 줄이고,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탄력근로제 범위를 확대해 장시간 노동에 대한 여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권리가 저울질되고 거래되었습니다.
올해 뜨거운 이슈였던 미투운동과 난민에 대해서는 자칭 감별사들이 판을 치기도 했습니다. 진짜 피해자인지, 가짜 난민인지, 꽃뱀인지,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인지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며 가짜는 나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최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이야기하자, 이번에는 진짜 양심을 가려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존엄하며 그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조항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와 중요해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평등한 세상을 향한 바람은 그야말로 ‘불온한 세상’을 향한 바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권을 외치다’
70년 전 세계대전을 겪은 후 스스로와 서로의 존엄을 떠올리며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70년, 이제 인권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유, 존엄, 평등 등의 단어에 대해서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인권이 존중과 환대의 언어로 사용되지 않는 사회, 가짜는 골라내고 진짜에게만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대에서 세계인권선언 채택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필요한건 축하나 기념이 아니라 세상과 불화하는 불온한 인권이라는 생각에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불온한 인권을 외치는 기자회견, 플래시몹, 집회, 토론회, 포럼 등을 모아 인권 주간을 선포하고 진행했어요. 단순히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인권의 가치를 기억하는 자리들을 더 많이 만들고자 했습니다.
70년 전 세계대전이 끝난 후 참혹한 현실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듯이, 서로 편을 가르거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지금 이 사회에서 다시 인권을 외쳤습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그 외침이 불온하다면, 앞으로도 더욱 불온한 인권을 말하고 싶습니다. 불온한 인권이 사회와 불화하며 만들어내는 질문 속에서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