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5일 아침에 다급한 목소리로 취재를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철도노조 조합원인데 방금 국가인권위 7층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철도노조는 6월 말 파업선언 2시간만에 경찰 폭력으로 강제 해산 당한 후에 ‘파업불참 서약서’, ‘파면’, ‘해임’, ‘조합비 압류’ 등 파업 패배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다가, ‘인권의 마지막 보루’라고 자임하는 인권위 건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기자들이 붐빌 텐데, 하루소식이라고 하면 어디서 온 지도 모를텐데 인터뷰에 응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고 걱정하며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농성시작한지 대여섯 시간 지났는데도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권위로부터 사무적인 어투의 퇴거요청 공문까지 받았고, 경찰 투입 최후 통첩 시간이 30분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농성 사진 한 장 찍어주는 사진 기자도 없었습니다. 조합원들과 함께 단식에 돌입한 가족들의 실망감 어린 얼굴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면서 저 또한 “파업 돌입과 복귀율은 그렇게 빨리 전하면서 정작 파업의 원인이나 파업 패배 후 현장 탄압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그들의 지적에 공감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선배활동가들과 은혜기도원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여기는 약물중독자, 정신질환자를 ‘은혜’의 힘으로 치유한다는 곳입니다. 숙소나 생활환경은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정도인데도 ‘종교’라는 간판 덕분에 무허가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수용자들은 보호자 동의 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실질적인 감금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수용자는 가족들이 부른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기도원으로 붙들려갔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계속되는 예배와 기도에 ‘규칙상’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생활방과 붙어 있는 한 평 넓이의 소위 ‘보호실’은 문을 밖으로 걸어 잠그게 되어 있는 교도소 징벌방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질환이 치료되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 받는 퇴원 절차도 없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될지도 모를 한 할아버지는 “나한테 남은 권리는 숨쉴 권리밖에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항상 낮은 곳에 시선을 두려면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진심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원칙을 다시 떠올리고 마음을 다져봅니다.
남들이 “기사거리가 안 된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현장이더라도 인간의 고통이 있다면 언제나 달려가서 누구의 이익 때문에 누가 희생되고 있는지, 그들이 가진 권리는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찾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감수성과 능력을 키워가고 싶습니다. 그 전까지는 ‘활동가’라는 이름이 언제나 어색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인권하루소식 기자로, 기획사업반 활동으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