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석 명절입니다. 소식지에 편지를 쓰라는 주문을 받고서도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야 편지 한 장 쓰게 되었습니다. 한가위 대보름달이 두둥실 떴는데, 달 보고 소원 비셨는지요? 명동성당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환한 보름달을 보면서 절로 풍요로움이 느껴지더군요. 그런데 추석 명절에 집에도 못 가고, 가족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는 곧 우울해졌습니다. 달은 저토록 환하고 달은 누구라도 차별 없이 빛을 비추는데 세상은 참 너무도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우울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미루어두고 잠을 청했지만 잠도 오지 않는 밤, 사랑방 활동가가 깔아준 영화나 보다가 새벽 담배 물고 성당 뜰을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명절이라고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가족도 못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저와 같은 수배자들도 있겠지만 야근하는 노동자도 있고, 갈 집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만날 사람이 없이 달세 내는 여인숙 방에서 혼자 소주 까는 사람들, 아예 밖에는 나올 생각도 못하는 감옥에 갇힌 사람과 각종 시설에 갇힌 사람 등등, 아하, 이런 날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주 한 잔 진하게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어둔 곳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추석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정운찬 총리가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을 방문했습니다.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기운이 주욱 빠졌습니다. 내용 전체로는 나쁘지만은 않지만, 용산참사 해결할 의지가 있던 것처럼 보이던 총리가 다시 이런 말을 하니까요. 설날 전에 입었던 상복을 추석 때도 벗지 못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사과 한 마디 던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지… 사람이 죽었고, 시퍼렇게 눈 뜨고 사람들이 발 동동 구르며 강제진압의 현장을 지켜봤는데도 중앙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니, 참 열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부인으로 일관해오던 정부를 상대로 해왔던 우리의 요구는 그야말로 소박하고 상식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서글프기조차 합니다.
사랑방 후원인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올해 3월 초부터 수배자입니다. 6개월 동안 순천향병원 영안실 4층에서 지내다가 한 달 전에 명동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명동성당에 안착하기까지 가슴 졸였던 그때가 기억납니다. 그리고 다음날 명동성당 경내를 내 발로 유유히 산책을 할 때의 그 감격은 갇혀 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격이었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새록새록 알아가는 그런 수배생활이지요. 명동성당으로 오면서 추석 전에는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철거민 열사들 장례를 지내고 감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살인적인 재개발 정책의 근본을 바꾸는 투쟁이라서 쉽지 않은 투쟁이려니 생각하지만 때로는 지쳐 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지금까지 9개월 째, 250여 일을 기다려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많은 사람들이 고인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소환장을 받고 있습니다. 피눈물의 시간을 견뎌내는 유가족과 철거민들이 있고, 그 곁을 지키는 신부님들과 용산범대위의 일꾼들이 있위의 일지친 모습을 내비치지도 못합니다. 서로가 의지가 되고, 서로가 힘이 되어야 끌고 갈 수 있위 투쟁, 연대 없이캔지도루도 버티기 힘든 나날들을 그렇게 세며 세며 이겨내고 있위 것이지요.
올해 초 세웠던 계획들은 모두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1월에 발생한 용산참사 문제로 사랑방에서 제가 맡은 역할들도 거의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료 활동가들이 힘들어 할 때 저는 그들의 곁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고민들을 같이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참 낯이 안서는 일이지요. 그런 저를 사랑방의 활동가들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고 있어서 늘 고마운 마음만 갖고 있습니다. 후원인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위기라고 해서 너나없이 IMF 때보다 살기 힘들다는 때에 사랑방의 활동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절로 고개 숙여집니다. 제가 지금 몰두하고 있는 용산문제를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양심이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한푼 두푼 꾸준히 성금 보내주고, 물품 모아서 보내주고, 너무 늦게 찾아왔다며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에 들러서 유가족 손을 꼬옥 잡아주고 가는 그런 마음들이 있어서 저도 버티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의 힘은 연대밖에 없다는 점을 사랑방 후원해주시는 분들이나 용산참사를 지지해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더욱 느낍니다.
이제 하늘도 높고 푸르른 가을입니다. 시간은 쏜 살 같이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연말이 되겠지요. 어느 곳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시작할지 모르지만, 다시 인사드릴 때까지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용산참사 문제를 풀고 다시 사랑방의 성원으로 활동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자유롭게 세상을 활보하는 날 반갑게 만나 술 한 잔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2009년 10월 3일 추석 명절에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박래군 드림.
추신)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국민법정’이 오는 10월 18일에 열립니다. 홈페이지(http://mbout.jinbo.net/court)를 방문해서 기소인으로, 배심원으로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