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을 만들지만 우리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 자리에 모여 요구한다. 복장, 피부,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함께 싸울 것이다.”
124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아 4월 27일 열린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집회에 참여한 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다. 이날 주요한 요구는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철회’였다.
출국만기보험이란 이름으로 도둑질 당한 퇴직금
지난 1월 개정된 ‘외국인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일명 고용허가제)의 주된 내용은 13조 ‘출국만기보험 또는 신탁’에 대한 조항으로 한 사업장에서 1년 이상 일할 경우 발생하는 퇴직금을 이주노동자가 출국한 후 14일내에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7월 29일부터 시행될 이 개정안은 이주노동자의 불법체류를 막겠다는 명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된 건 이주노동자 운동이 성장하며 법적․사회적 투쟁을 이어가는 가운데 1995년 ‘외국인 근로자도 그 체류상태가 합법이건 불법이건 노동법 상에서 규정하는 근로자성을 인정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였다. 이후 미등록이주노동자 또한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게 되었으며, 임금체불을 비롯한 여러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정부는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던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제한하며 역사를 뒤로 거스르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횟수를 제한하였고, 2012년부터는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정보도 주지 않아 자신이 일할 사업장을 선택할 수 없게 막았다. 오직 사업주가 이주노동자를 선택적으로 고용할 뿐, 이주노동자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노동환경인지 모른 채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시행하겠다는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는 퇴직금은 퇴사 후 14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노동권을 보장받으려면 한국을 나가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붙이고 있다. 심지어 이 같은 법률 개정은 국적이나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하도록 한 근로기준법 제6조 균등처우의 원칙을 위반한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오랜 기간 사회가 만들어온 이주노동자가 그 신분이 어떠하든 노동권을 인정받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원칙을 부정한 것이기도 하다.
출국만기보험의 내용 또한 사실상 노동권을 침해한다.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지급받는 퇴직금 제도와 달리 출국만기보험는 고용허가서에 기재된 월 통상임금의 8.3%만을 납부하도록 되어있어, 실제 받아야 하는 퇴직금에 비해 보험료가 적어 이주노동자들이 피해를 받는다. 정부가 만들어놓은 제도로 인해 그것의 적용을 받는 당사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는 것이다. 또한 사업장을 이탈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보험료 지급을 하지 않아 사실상 퇴직금을 받는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분명 균등대우의 원칙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주노동자는 체류 자격이 바뀌는 순간 퇴직금도 사라지는 꼴이다.
이와 같은 제도가 정작 당사자인 이주노동자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추진되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2011년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사업주가 출국만기보험에 가입했는지 모르고 있거나 가입을 안 한 상태라는 답변이 여전히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2012년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고용허가제가 시작된 이후 이주노동자에게 지급되지 않은 보험금이 215억4천700만 원에 이른다. 이는 2004년부터 8년 동안 2만7천819명(건)의 이주노동자들의 퇴직금이 떼이면서 쌓인 액수였다. 청구시효가 소멸되는 2년 후에 미청구보험금은 고스란히 보험사의 수익으로 귀속되고 있었다. 출국만기보험 방식 하에서 이주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하는 정당한 대가는 엉뚱하게도 사업주에게, 그리고 이를 독점하고 있는 삼성화재해상보험에게 돌아갔다. 구제절차를 잘 알지 못해서, 언어의 장벽으로, 귀국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주노동자들이 이를 되찾겠다고 결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인간이 아닌 구체적 얼굴로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이루어진 이번 개악 소식에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도 제대로 받기 힘든 퇴직금을 출국 후에 받으라는 게 가당치도 않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퇴직금을 미끼로 삼아서 이주노동자들의 불법 체류를 막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법적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만들어진 고용허가제에 태생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근로자를 체계적으로 도입 관리하여 원활한 인력수급 및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용허가제에서 이주노동자는 내국인 노동자를 대신할 ‘수단’이자 인력난 해소를 위한 ‘활용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간 몇 차례의 개정 과정에서 고용허가제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담아내면서 일방적으로 사업주만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왔고, 이주노동자는 그에 맞춰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를 어기는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을 감수하고, 사업주의 부당한 대우에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미등록이 될 경우 자신의 노동권이 박탈될 수 있다는 압력 속에 등록 이주노동자는 쉽게 자신의 피해에 맞설 수가 없다. 고용허가제의 계속되는 개정은 사업주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이주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빼앗은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등록으로 내몰린 이주노동자들은 박탈된 노동권에 의해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기본권을 내줘야 하는 꼴이다.
8월이면 고용허가제 도입 10년이 된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이름의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제도라는 비판적 평가를 받아왔다. 현재 도마 위에 오른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는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간 정부가 반복해온 어쭙잖은 변명은 필요 없다. 지금 퇴직금마저 도둑질하려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부터 제대로 들으려고 하는 것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다.
한쪽으로는 일회용 마냥 쓰고 버리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다문화 포용을 강조하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자본과 정부의 필요에 맞춰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대상으로서 일방적으로 위치 지어져왔다. 출발부터 어긋났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을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고 ‘불법’인간으로 내몰아왔다.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보장 받아야 할 권리를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예외적인 것처럼 취급하려는 시도가 겨냥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것을 넘어 존엄하고 평등한 인간으로 만나고 관계하려는 우리의 감각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인력’‘불법체류자’‘미등록노동자’ 등의 이름을 붙이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 추방될 수 있는 존재라 여기게끔 하는 자본과 정부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그토록 지우려고 했던 구체적인 얼굴들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