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연고가 없는 출소 장기수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는 낙성대 「만남의 집」이 새 식구를 맞았다.
13일 특별사면을 통해 석방된 비전향장기수 최하종(72세, 36년 구금), 김인수(76세, 36년 구금), 홍경선(74세, 31년 구금) 씨가 그들이다.
출소 6일째인 18일, 최 씨 등은 머리를 맞대고 먼저 출소한 유운형(75세, 34년 구금) 씨에게 설명을 들으며 생활보호대상자 신청 서류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서류에 주민등록번호 기재란을 비워둔 것을 가리키며 최 씨는 "우리는 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면 한 달에 15만원 정도가 지원된다"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홍경선 씨는 "동지들을 두고 나오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김대중 씨에게 많은 기대를 했는데 배신감마저 느낀다"며 많은 장기수들이 사면되지 못한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한 독지가가 마련해 준 2층 양옥인 낙성대 「만남의 집」에는 이들 새 식구 외에 7명의 장기수들이 생활하고 있다. 세계최장기수로 알려졌던 김선명(74세, 45년 구금) 씨는 기공소에 일자리를 얻어 아침 일찍부터 출근을 했고, 이종(88세), 최남규(87세) 씨등 4명의 장기수들은 연로한 탓인지 걸음걸이조차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만남의 집의 하나뿐인 여성 장기수인 정순덕(66세, 23년 구금)씨는 의족에 의지한 몸으로 분주하게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이들의 조용한 일상에 새식구들의 삶이 보태졌다.
최하종 씨는 "지금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다. 현재 생활능력이 어린이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에 남한 생활에 익숙해지면 그 후에 내 생활을 위해 일자리도 찾아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모두들 양로원 아니면 갱생보호소에서 지내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동지들과 만나 너무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집이 더욱 비좁아져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우리들보다 좀 젊다는 이유로 다리도 성하지 않은 정순덕 씨가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모두 해 주는데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이에 대해 정순덕 씨는 "이렇게 살아서 만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선생들이 스스로 방청소도 하고 식사 때마다 도와줘서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의족에 의지한 식사준비 모습은 힘에 부쳐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이들은 또다시 석가탄신일 사면을 기다려야 한다. 옥에 두고 나온 동지들의 석방에 대한 기대가 크겠지만 홍경선 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대대적인 사면을 한다고 하면서 그 당일 국무회의를 하는 등 형식이란 형식은 다 갖춰놓고 6명만 내보내주지 않았냐. 일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천천히 사면을 할 것이라고 하는데 석가탄신일 때 사면할 걸 왜 이번엔 못했겠느냐"며 별반 기대를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접고 난 후 출소 장기수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서를 가지고 관악구청으로 향한다. "오는 길에는 공중전화 거는 방법을 배워야겠다"며 바깥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