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집에 가”
지난 6월 10일 새벽 2시경 컨테이너박스 앞에서 20대로 추정되는 한 남성과 격론을 벌였다. 그 남성은 안전을 이유로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나는 차벽이 갖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직접행동으로 스티로폼을 쌓고 있으며, 안전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임을 강조했다. 어느 정도 소통이 되었다고 판단된 순간, 곧이어 그 남성이 내게 던진 한마디는 “아줌마는 집에 가”였다. 시위대 안에서 아줌마로 불리는 순간, 여성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70만이 모인 6.10촛불집회에서 사회를 보았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는 “누구누구 오셨나요?”를 물어보면서 여성을 가리켜 “유모차 부대 오셨어요?” “하이힐 부대 오셨어요?”라고 두 가지로 호명했다. 유모차나 하이힐이라는 은유에서 보듯이 여성은 결혼이나 육아를 통해 시민권이 인정되고, 여성의 특질은 외양으로 판단된다. 촛불집회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이름이 없는 존재로 흡수된다. 또한 어떤 집단을 부를 때 ‘부대’와 같은 군사주의 언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된다. 시위대를 막아선 전경이나 시위대 앞에 또 다른 저지선으로 서있는 예비군이 나의 눈에는 같은 존재로 보인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줄게”
촛불의 발화지점에 어린이·청소년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 그러나 촛불집회 안에서 이들을 미성숙한(?) 보호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구호와 행동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줄게.” 이 말 속에는 어른들이 촛불집회를 이어갈 테니 너희들은 학교나 집에 가서 공부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어린이·청소년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정치적인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어른들이 보호해야할 존재로 투사된다. 그래서 어린이·청소년이 하는 활동은 어른들의 필터-기특하네, 밤이 깊었는데 이제 그만 집에 가지-로 걸러지고 만다. 연행되는 여성 청소년의 저항은 “집에 보내주세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사진으로 둔갑하고,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나지만 중고등학생들의 등교거부는 ‘있어서는 안 될 일’로 취급된다. 경찰과 대치라도 할라치면 시위대에 의해 만들어진 저지선에서조차 어린이·청소년과 여성은 보호의 대상이 된다. “여성, 청소년들은 위험합니다. 뒤로 빠져 주세요. 인도로 올라가 주세요. 보호하려는 겁니다.” 이렇듯 사회적 소수자는 통제와 보호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국적을 기본으로 하는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가장 먼저 배제되는 사람은 이주민들이다. 남성이주노동자, 국제결혼이주여성들도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되면 피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촛불집회에 한국사회 한 구성원으로 결합하는 이주민들을 찾기 어렵다. 이주민은 분명히 한국사회 구성원으로 살고 있지만 국민이라는 경계 바깥에서 한국사회를 관찰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한국사회가 이주민을 타자화 시키는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들도 스스로를 타자화 시킨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대한민국~ 짜작짜 짝짝’을 연발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이주민은 설 곳이 없다.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는 최현모 씨는 “국민을 가르는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라고 반문하며, 국적을 가진 국민이 아닌 사회공동체 성원으로 시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시민권의 확장과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명박=세살 어린이, 게이
촛불집회에서 사회적 소수자가 주체로 설 수 없는 조건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6월 21일 비혼행진에서 만난 여성장애인은 그동안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몸이 불편하면 집에 있으라’는 시선이 따가웠다고 한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행진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전한다.
6월 9일 운하반대국민행동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대운하를 추진하는 정부관료들을 ‘세살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는 모습’으로 재현했다. 운하반대국민행동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대운하 정책이 ‘유아기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꼬집는 퍼포먼스라고 설명했다. 6월 10일 등장한 컨테이너 박스에는 누군가 이명박의 초상화를 그리고 ‘I'm gay’라고 썼다. 너나없이 들고 있는 손자보에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미친 소, 앉은뱅이 소’라고 표현한다.
‘세살 어린이, 게이’를 이명박으로 묘사한 은유에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 숨어있다. 세살 어린이, 게이는 ‘열등하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자연스럽게 이명박으로 은유화 된 ‘나이와 성적 지향’의 이미지는 열등하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차이에 위계를 형성하고 다시 구조화된 차별로 공고해진다. 또한 광우병을 ‘미친 소, 앉은뱅이 소’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정신장애와 지체장애를 겪고 있는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발견할 수 있다. 비장애가 정상이고 장애는 정상을 획득할 수 없는 무익한 존재라는 낙인과 비하가 숨어있다. 광우병에 걸린 소는 돈에 눈이 먼 인간에 의해 먹고 싶지도 않고 먹어서도 안 될 몹쓸 사료를 먹은 ‘아픈 소’일뿐이다. 생태에 반하는 인간의 폭력으로 아픈 소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이며, 반생태적인 구조-육식을 산업화하고 대량생산하는 구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식물성 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구조-를 끊어내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렌즈
빛을 보기 위해서는 빛을 볼 수 있는 렌즈가 필요하다. 어둠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빛을 보는 렌즈로는 어둠을 볼 수 없다. 또한 어둠을 보는 렌즈로는 빛을 볼 수 없다. 어둠을 투시할 수 있는 렌즈가 필요하다. 지금 촛불집회에 투사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우리에게 인권, 평화, 생태, 여성주의라는 렌즈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아버지의 연장으로는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듯이 구체제를 넘는 새로운 대안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실천 없이 아마 우리는 한발자국도 내딛기 힘들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가 되기 위해서 그 무기를 갈고 닦을 숫돌이 필요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촉발된 촛불은 다만 미국산 쇠고기 반대를 넘어 이명박 정권으로 상징화되는 ‘기존의 권력구조’에 저항하고 있다. ‘아픈 소’는 미국산 쇠고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0교시와 우열반에 시달리고, 하루 밤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에 서민들은 먹을 것, 갈 곳, 잘 곳을 걱정한다. 7월이면 2차 비정규직법이 시행되고 비정규직이 지금보다 확대될 전망이다.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놓은 친자본주의, 성장지상주의, 결과중심주의, 가부장주의로 대변되는 주류권력을 넘어서고 싶다면, 우리 안에 내면화된 편견과 차별을 직면하고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다양한 차이를 위계화 시켜 차별을 만드는 구조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권력구조까지 볼 수 있는 힘은 차이를 위계화 하는 권력구조와 경쟁을 통해 재생산되는 구조화된 차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이럴 때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연대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이 시민으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촛불집회, 모두가 당당한 주체로! 다양한 방식으로!
촛불집회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거나 커튼 뒤에 숨어야 할 인간이 아니다. 촛불이라는 상징어로 표현되는 집단적 저항에는 어린이·청소년, 네티즌, 여성, 성적 소수자 심지어 예비군까지 포함되어 있다. 촛불집회라는 해방의 공간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노숙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주눅 들지 않고, 차별 받지 않고 당당히 말하며, 이러한 다양성이 저항 없이 평등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 그 힘으로,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뭔가 한 건을 하고 싶은 안하무인,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라도 불 붓는 촛불을 잠재우려고 국민을 우롱하는 심뽀, 배후가 있다는 둥 체포영장을 발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저 높으신 분들에게 신나게 똥침을 날리자.
덧붙임
승은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