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마을의 불법 인권유린 실상
3미터가 넘는 담장. 그 담장 너머로 또 하나의 높다란 담벼락이 세상을 둘로 가르고 있다.
‘양지마을’은 그 높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한 16일 이른 아침, 진상조사단과 취재진은 ‘양지마을’ 정문 앞에 다다랐다. 들리는 건 자동차 엔진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방문객들의 심장박동 소리 뿐. 마침내 오전 7시 30분, 서울에서 내려온 ‘불청객’들은 기습적으로 ‘양지마을’의 외곽정문을 통과했다. 경비직원의 저항을 뚫고 30여초 만에 또 하나의 장벽을 돌파한 조사단과 취재진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온 인간의 모습들을 확인했다.
“나가고 싶어요”
조사단이 처음 찾아간 곳은 여자 원생들의 숙소. 그들은 일순 긴장하면서도 방문객들을 환영해마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을 찾자 모두가 손을 번쩍 든다. 나이가 예순이 넘었다는 윤 씨는 “나가고 싶어 죽겠다”면서도 지금껏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조사단에게 말하는 것조차 조심했다. 역시 ‘후환’이 두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자 원생들의 숙소 뒷편 건물은 남자 원생들의 숙소였다. 그런데, 오전 8시가 지나도록 숙소 주변엔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곧 풀렸다. 남자 원생 모두가 숙소 안에 감금중이었기 때문이다. ‘양지마을’의 원생들은 작업을 마친 저녁 시간 이후부터 다음날 오전 식사 때까지 외부에서 잠가둔 숙소 안에 감금된 채 지내고 있었다. 또 모든 창문엔 ‘탈출방지용’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자 원생들은 쇠창살 너머로 방문객들을 맞이했고, 너나 할 것 없이 응어리를 토해냈다. “술 먹고 잔 게 무슨 죄라고 이렇게 감금해 둘 수 있습니까” “밖에 나가려고 생활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가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원생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양지마을에 들어온 이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다. 기한이 정해진 징역살이에선 그나마 달력을 지워나갈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이사장의 허락없이 누구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박흥만(76) 씨는 무려 16년간을 양지마을에 갇혀 지냈다고 밝혔다. 이어 한 원생이 울분을 털어놓는다. “여기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단지 양지원 원생, 노예일 뿐입니다.”
“찍어주는 대로 실었다”
원생들은 양지마을에 들어온 과정부터가 부당했다고 호소한다.
이진수(51) 씨는 “술 한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천안 역전에서 끌려왔다”고 밝혔다. 김재성(41) 씨는 역에서 차표 환불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끝에 경찰의 도움을 요청했다가 어이없게 양지마을로 끌려왔단다.
원생이면서도 사람들을 직접 양지마을로 끌고오는 일을 맡아온 김영화 씨는 “원장 지시로 단속을 나가면, 신원확인 절차없이 경찰이나 군청 사회과 직원이 찍어주는 대로 실어갔다”고 털어놨다. 김 씨는 또 “그 대가로 양지마을에서는 개를 가져다주곤 했다”고 말했다.
있으나마나 심사절차
그러나 양지마을에 끌려오는 과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부랑인들이 수용되면 당연히 이를 심사해야할 공무원들은 정기적인 심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양지마을 운영자측과 유착되어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따라서 원생들마다 공무원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강제노역과 구타․강제투약
이렇게 수용된 양지마을의 원생들에겐 짐승과 같은 대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타와 강제노역, 심지어 강제로 약을 투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원생들은 증언했다.
원생들은 양지마을의 대표적인 구타 사례로 박종문 씨가 당한 일을 꼽는다. 박 씨는 지난해 무려 1시간 가량구타를 당했고, 당시 그의 얼굴은 사람을 못 알아 볼 정도였다고 한다.
정신요양시설에 갇힌 한 원생은 “말을 듣지 않으니까 독방에 가두고 그때부터 강한 신경안정제를 투약했다”고 폭로했다. 그마저 의사의 처방이 아니라 이사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원생들의 고통 가운데 또 하나는 강제노역이다. 양지마을에선 작업수락서에 도장을 찍어야만 노역을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이 강제로 무인을 찍도록 만들며, 거기에 불응하면 폭행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원생들이 받는 노동의 대가는 고작 한달에 8천원 내지 1만3천원 정도. 양지마을측은 나머지 돈을 통장에 적립하고 있다고 하지만, 5년 가까이 생활해온 한 원생의 총지출과 적립금의 합계가 불과 1백만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면회와 서신 제한, 신문․잡지 구독금지 등 양지마을의 인권유린에 대한 증언은 그 끝을 보기가 어렵다.
이사장의 강변
오후 5시경 조사가 마무리되자, 23명의 원생에 대해 퇴원이 결정됐다. 열릴 것 같지 않던 철문이 열리는 순간, 감격한 원생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네면서도 그들은 남겨진 동료들에 대한 걱정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불법인권유린의 현장을 들킨 노 이사장은 발악이라도 하듯 강변했다. “이제 폭동이 일어날 거요.” 그의 눈에 원생들은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