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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한국 감옥의 현실 ① 소내 가혹행위

끊이지 않는 구타…징벌의 악순환


한국의 감옥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다. 교도관에 의한 재소자 구타, 부당하고 과도한 징벌 및 계구사용, 권리구제 방해, 의료방치, 노동착취 등 온갖 인권문제가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감옥이다. 교도소가 범죄인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기능만 할 뿐, 재소자들에 대한 실효성 있는 사회복귀 프로그램 역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인권하루소식>은 앞으로 7회에 걸쳐(매주 1회씩) 교도소내 가혹행위, 재소자 권리구제 방해, 의료, 작업과 교육, 주부식과 구매, 민영교도소, 국가인권위원회 시대의 감옥인권 문제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최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박영두 씨 사망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그의 사망은 단순한 심장마비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송보호감호소에 수용됐던 박씨가 84년 10월 12일 보안과 지하실에 끌려가서 집단구타와 일명 ‘비녀꽂기’와 ‘통닭구이’, ‘관절뽑기’와 같은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이미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터였다.

지금도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재소자와 출소자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부의 답변은 한결같다. “그런 일 없었다”는 것이다. 의혹은 무성하지만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곳, 우리 감옥의 현실이다.

구타 견디다 못해 자해도

양만신 씨의 사례는 감옥 내 가혹행위가 얼마나 심각하며, 그것이 어떻게 은폐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93년 6월 14일 낮 12시경 대전에서 이감되는 재소자 20여명이 청송제2교도소에 도착했다. 차멀미로 뒤틀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던 양만신 씨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말과 함께 교도관 10여명에 의해 구석진 곳으로 끌려가 3-4시간 가량 몰매를 맞았다. 한 교도관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양씨의 입안에 흙을 퍼넣기도 했다. 제대로 설 힘조차 없어 기어다닐 정도였지만 양 씨는 같이 이송된 무리에 끼어 얼차례까지 받은 뒤에야 입방할 수 있었다.

이감 온 다음날엔 재소자 준수사항을 암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동인원 전원이 식구통 밖으로 발을 내민 상태에서 교도봉으로 발바닥을 맞았다. 그 다음날엔 순시중이던 소장에게 교도관들의 구타사실을 말하고 처벌을 요구했다가 관구실로 끌려가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 또 한 차례 구타를 당했다. 그 후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암기사항(징벌규칙 등), 복창소리, 방안정리, 정좌 등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구타가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양 씨는 가혹행위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93년 9월 7일 귀두를 자르는 자해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외부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교도관들이 입에 방성구를 씌워 의사와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수술 후 교도소로 돌아왔을 땐, 징벌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9월 20일경부터 시작된 징벌은 2개월 여만에 끝났지만 94년 7월 8일까지 약 10개월 가량 수갑을 차고 생활해야 했다.

양만신 씨는 99년에야 형사고소를 할 수 있었지만 검찰은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리했고, 이제 양 씨가 기대할 것은 민사소송의 결과뿐이다.

‘가혹행위 호소’ 줄이어

청송 외에도 대전을 비롯해 안동, 원주, 마산, 영등포, 서울 등 각지의 교도소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재소자의 호소가 줄을 잇고 있다.

지난해 안동에서 출소한 조규선 씨는 98년 11월경 보안과 지하실에 끌려가 당한 고문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조씨는 “수갑과 포승이 채워진 상태에서 정해우 보안계장의 지시로 교도관들에게 통나무 2개를 다리에 끼워 양쪽으로 벌리는 관절뽑기 고문과 비녀꽂기, 손가락 젖히기와 곤봉으로 발바닥을 맞았다”고 호소했다. 그는 가혹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지하실에 있던 연탄난로를 발로 찬 후 들어올려 양손바닥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고 밝혔다. 출소 후 생업에 쫓기는 조 씨는 사법부의 심판을 호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청산 못한 일제시대의 관행

가혹행위를 호소하는 재소자와 출소자는 대개 비슷한 절차를 경험한다.
교도소측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항의하다가 ‘난동자’로 지목돼 관구실이나 보안과 지하실로 끌려간 뒤 교도관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대부분 수갑과 혁수정을 차고 쇠사슬에 묶이고 안면보호구까지 쓴 상태에서 얻어맞기 때문에 저항하기도 힘들다. 흠씬 두들겨 맞은 뒤엔 자신의 ‘난동’이 어떻게 관규를 위반한 것인지 교도관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쓰고, 그 다음엔 징벌을 받는다.

징벌이 결정되면 각종 계구가 채워진 채로 0.75평의 작은 방에서 혼자, 때로는 두세 명이 엇갈려 누운 채 지내야만 한다. 누운 채 손을 사용하지 않고 식판의 밥을 먹어야 하고(그래서 개밥이라 부른다), 대소변도 누워서 볼 수밖에 없다. 그 기간 동안 면회와 서신은 금지되며 건강진료조차 중단된다. 징벌이 끝나면 오래지 않아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고, 이감된 곳에서도 청원이나 고소장 발송을 요구하다가 또다시 가혹행위를 당한다.

이런 ‘관행’은 고문을 일삼던 일제시대 교도관들의 행태가 해방 후에도 근절되지 못한 탓이다. 지금껏 고문교도관이 처벌된 사례는 눈 씻고 봐도 찾아내기 어려우며, 오히려 가혹행위를 하고도 버젓이 현직근무가 용인되는 실정이다. 박영두 씨를 고문했던 교도관 가운데도 두 명이 공직에 남아 있다. 가혹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엄중한 처벌이 정착되지 않는 한 감옥은 언제까지고 살벌한 세계로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