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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시효는 없다, 반인도적 국가범죄! ①

처벌되지 않는 국가범죄, 고 박영두 치사사건!


<편집자 주> 반인도적 국가범죄 처벌과 공소시효 배제 입법화를 촉구하는 운동이 피해유족들과 인권․사회단체에 의해 본격화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앞으로 6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 금요일자에 반인도적 국가범죄와 공소시효 문제를 둘러싼 쟁점과 대안을 살펴본다.

박영두는 1984.10.12. … 15:00경, 계속하여 의무과 연출을 요구하자 관구주임 이잠술과 관구교사 박수호 등이 박영두를 의무과로 연출해 준다며 8동 지하실로 끌고 갔다.

관구주임 이잠술, 관구교사 박수호, 관구교사 이OO, 교도 김의식, 교도 김명겸 외 3~4명의 교도관은 박영두를 뒤로 시승시갑한 후, 소위 비녀꽂기(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 고개 뒤로 젖히고, 양 팔꿈치가 서로 붙도록 묶은 다음 목과 팔꿈치 사이에 각목을 끼워, 각목을 틀어 젖히며 고통을 주는 방식의 가혹행위), 통닭구이(양 손목을 뒤로 묶고, 양 발목을 묶은 다음 묶인 부분을 포승줄로 연결한 후 포승줄을 잡아당겨 몸이 활처럼 휘게 하여 고통을 주는 방식의 가혹행위) 상태로, 관구주임 이잠술, 관구교사 박수호, 교도 김의식, 교도 김명겸 등 교도관 7~8명이 박영두를 교정봉, 포승, 피대, 고무호스, 워커발 등으로 약 2시간 동안 집단 폭행하였다.

박영두는 폭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3~4차례 의식을 잃었으나, 그 때마다 교도관들이 물을 끼얹어가며 구타 및 가혹행위를 계속하였다.

그 다음날인 1984.10.13. … 05:30경 담당교도관 전OO는 박영두의 동태가 이상하다는 동정보고를 경비교도대원으로부터 재차 보고받고 감방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박영두는 양손을 몸 앞쪽으로 수정(수갑)을 한 채 엎드린 상태로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고, 바지를 벗겨보니 생똥을 싼 상태였으며, 눈동자는 흰자만 보이고 윗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상의를 들춰보니 등 전체가 시커멓게 변해 있는 상태로 사망해 있었다. <의문사위 보고서 '박영두의 사망경위' 부분 중>

지난해 6월 의문사위는 의문사 중 故박영두 씨 사건을 최초로 진상규명했다. 17년간 침묵하고 있던 진실을 결국 세상에 밝힌 것. 그전까지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어 고소장 한번 쓸 수 없었던, 특히 5공 시절에는 관계기관에 진정조차 할 수 없었던, 故박영두 씨의 큰 형 박영일 씨는 그제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박영일 씨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17년이 지난 지금,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처벌을 못한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이제라도) 법을 개정하고 억울한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침묵을 강요당한 시절'이 지나자, 국가는 공소시효를 방패막이로 국가범죄의 처벌책임을 또 다시 방기했다. 그 고통은 피해유족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었다.


은폐된 반인도적 국가범죄

의문사위가 밝힌 보고서에 따르면, 박영두 씨가 사망한 날 오전 청송교도소 김명식 소장의 주재로 관계직원 대책회의를 했다. 이후 대구지검 의성지청 소속 최모 검사의 지휘로 부검을 실시했고, 최 검사는 '타살혐의 없으므로 사체를 행정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부검을 실시한 당시 청송 동산외과병원 김모 원장도 '외표소견 및 내경검사에는 사인이 될만한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음'이라고 교도소 쪽에 소견을 냈다.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자행된 고문․폭행과 살인 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되는 과정은 반인도적 국가범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동생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청송교도소에 도착한 박씨는 결코 동생의 시신을 볼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이미 동생의 시신을 매장해 버린 것. 박씨가 동생의 사인을 묻자 교도소 쪽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말만 했고, 부검을 했던 의사는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때는 눈물도 안 나고, 막막하니까... 말할 그것도 없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박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 처리에 박씨는 애초부터 동생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5공 청문회 이후 관계기관에 진정서도 숱하게 냈습니다. 그러나 답신도 없고 지치고 그래서, '내 힘으론 안 되겠구나' 포기하려고 했지요. 잊어버리려 노력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가 의문사위가 진실을 밝혔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계속되는 가해, 지속되는 피해

공소시효란 '범행 후 장기간이 경과한 경우 증거가 소멸하거나 범인 스스로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점등을 감안해 형벌권을 소멸시키는 형사절차상의 제도'를 뜻한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박씨는 "그 사람들이 고통받고 참회를 했습니까? 도망다니고 숨기나 했습니까? 뉘우치고 미안해하는 감이 전혀 없습니다. 사죄한 일도 없고... 오히려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더 큰소리 치며 당당하게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피해유족들이 '침묵을 강요당한 시절' 그리고 고통이 온존하고 있는 현재에도, 가해교도관들은 떳떳하게 공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사건 당시 김명겸 교도관은 현재 청송제2교도소 배치부장으로 지금까지 청송교도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대구지검 김천지원 등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계속되는 굴절된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소시효 기간 동안 범인 스스로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주장이 무조건 옹호되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