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고 일하게 해달라
내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린 지 한 달만에 그 분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진폐증'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광맥을 쫓아다니던 도중 당신도 모르게 허파 깊숙이 쌓였던 먼지 찌꺼기들이 미처 손주의 재롱도 볼 새 없이 이승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때가 때였던지라 직업병 판정이나 보상은 없었다. 그보다도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수명을 재촉했다는 사실은 당신 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절통한 일이었다.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들려 온다. 산업현장 곳곳에 직업병과 산업재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있다는 소식이다. 인천의 한 공단에서는 주물공장 노동자 5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진폐증을 비롯한 폐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광부들만의 질병인 줄 알았던 진폐증이 일반 제조업 노동자들까지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이야기다.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는 수십명의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요양에 들어갔다. 병명은 '근골격계 질환'. 쉽게 말해 오랜 육체노동의 결과, 허리가 쑤시고 어깨가 결리는 등의 통증이 고질화된 것을 말한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라면 누구나 걸리기 쉽고, 책상 앞에 앉아 근무하는 사무직 노동자들도 비켜가기 쉽지 않은 질환인데, 그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다. 해마다 25명씩의 집배원 노동자들이 과로에 따른 안전사고로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도 발표됐다. 하루 평균 14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량이 빚어내고 있는 결과라 한다. 도대체 또 어떤 업종과 직장에서 '죽음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될 지 걱정스럽다.
직업병과 산업재해에 대한 최근의 경고는 결코 흘려들을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병들고 다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무환경, 부실한 산업안전시스템 등 총체적 노동조건의 결과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대책도 이미 나와 있다. 전반적인 역학조사, 그에 따른 시스템 정비, 그리고 부족한 인력의 채용과 환자에 대한 즉각적인 휴식 보장 등은 가장 기본적인 조처다.
하지만 나를 더욱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직업병 폭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이다. "제조업 종사자 가운데 자기 몸이 100% 완벽한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오래 근무하다보면 당연히 나타나는 질환"인데 왜 호들갑이냐는 식의 반응을 볼 때면 소름마저 돋는다.
일하다 보면 아픈 것이 당연하고 재수 없으면 다칠 수도 있다는 식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한, 산업현장의 암운을 걷어내기란 무망할 것이다. "아프지 않고 일하게 해달라"는 노동자들의 가장 원초적인 목소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이창조 씨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