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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6)

금정굴 학살, “부역자 가족은 씨를 말려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나흘만에 인민군은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경기도 일대는, 같은 해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28일 서울에 진주할 때까지, 인민군에 의해 통치됐다. 서울수복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계속해서 북진을 했고, 중앙권력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가운데 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은 경기도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인민군에 적극 협력했던 좌익들은 인민군을 따라 이미 북으로 올라갔지만, 지역에 남은 민간인들에 대한 경찰과 우익단체들의 학살은 부역자 처벌을 명분으로 잔인하게 진행됐다.

두개골 70여점, 장뼈 7백80여점, 손을 묶었던 P.P선 1백50여점, 어린아이 신발을 비롯한 1백여 개의 신발, 가지런한 채 그대로인 비녀 꽂은 머리, 어느 소녀의 것으로 추측되는 굵은 댕기머리, 문양도 선명한 허리띠의 바클, 지금도 선명하게 찍히는 도장 등... 95년 9월 경기도 고양시 고봉산 자락에서 수직으로 15미터를 파고 내려가자, 45년 동안이나 땅 속에 묻혀있던 유골과 유품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곳에서 유골들이 발굴되리라 익히 예상했던 유족들도 막상 그 광경이 펼쳐지자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당시 유골 발굴은 17미터까지 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붕괴의 위험과 발굴 비용의 문제 때문. 하지만 불과 2미터 깊이에서 나온 유골만 하더라도 발굴현장 주위를 둘러싸기에 충분했다.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의 감정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는 최소 1백53명이다. 이 중 여성이 10% 이상을 차지하며, 10대 후반의 뼈도 발견됐다고 한다.

이곳은 일제강점시기 금을 캘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수직으로 파 내려간 곳으로, '금정굴'이라 불러졌다. 50년 9·28 서울 수복 후 경찰과 우익단체들은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해 묻어버렸다. 빨갱이의 씨를 없애야 한다는 이유였다. 고양 금정굴 유족회 서병규 회장은 금정굴의 깊이가 50미터나 된다고 하니, 금정굴에서 학살된 수는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오늘날 추정되고 있다.

13일 아침 11시경 10여 명의 재미동포 청년들이 금정굴을 찾았다. 이들 재미동포 청년을 맞은 서병규 회장은 자신이 겪은 억울함에 목이 메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인민군 점령 당시 둘째 형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들은 서 회장의 아버지와 첫째 형, 셋째 형을 금정굴에서 학살했다.

"삶이라는 게 말할 수 없어요. 어디 가서 입 뻥끗 못하고, 죽어서 살아야 했어요. 제를 올리고 싶어도 그 사람들이 목격할까 봐 40년 동안 오지도 못했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날 붙들고 '같이 죽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하시는 걸 제가 말렸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요. 또 한번은 낳은 애기를 엎어놓고 저보고 죽이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어머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고 애기를 바로 뉘였어요. 그리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했죠. 농사고 노동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당시 학살의 충격으로 서 회장은 청각 장애자가 되어 지금까지 보청기를 하고 있다. 또 가해자들이 부역자 가족이니 빨갱이 가족이니 하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 고향을 떠나 살아야만 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일어난다는 서 회장은 끝으로 재미동포 청년들에게 "여러분들이 이런 유족들의 억울함을 선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을 했다.

고양 금정굴 유족회 마임순 총무의 사연도 기구했다. 마 총무는 금정굴 학살로 인해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삼촌과 시숙 2명을 잃었다. 이유는 시아버지의 동생되는 분이 한국전쟁 당시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치안부대원들은 당시 16살, 13살 밖에 안된 시숙들을 금정굴 인근 '새벽구덩이'로 데려와 학살했다. '부역자 가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촌 당숙의 양자로 입양돼 있던 마 총무의 남편도 치안부대원에 잡힐 뻔했으나, 큰 항아리에 숨어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 총무의 남편은 겨우 5살이었다.

하지만 이들 가족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 총무의 남편은 3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임용되지 못했고, 미국에서 일하려 측량기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미국으로 출국하지 못했다. 시누이의 아들 또한 육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입학하지 못했다. 모두 연좌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래 마 총무 시댁 소유의 집과 토지(2백50평)를 가해자 쪽에 빼앗겨 끝내 소유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20년이 넘게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 탓이었다.

억울함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의 유족들은 93년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바로 진상규명 활동에 나섰다. 그 덕에 금정굴 학살사건은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99년에는 경기도의회가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2개월간 진상조사를 하기도 했다. 또 다음달에는 제10회 희생자 위령제를 올릴 예정이다.

「고양금정굴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춘열 집행위원장은 "현재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이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지자체 차원으론 △현장정비 △유골안치 △위령탑 건립 등을, 중앙정부와 국회 차원으론 △통합특별법 제정 △공식적인 진상조사 △명예회복 조치 등을 요구할 계획이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금정굴을 학살위령 공간으로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삼고 싶다는 바램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