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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문헌으로 인권읽기] 런던부랑인의 절규(1883)

188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이 팜플렛은 세상을 경악케 하고 빈곤을 '발견'케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발견'되어야만 했을까?

사회권이란 인권이 인식되기 이전에 빈곤은 죄악이었다. 승승장구하는 경제적 성장과 번영으로 인해 눈에 띄는 곤란은 감소된 것으로 여겨졌고, 보다 숙련된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보게 됐다. 많은 중산층들은 빈곤이 성공적으로 퇴치되었다고 여겼다. 이 번영의 시기에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건 인간말짜인 것으로 게으르고, 나쁜 습관을 못 고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탓이라 여겼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인간말짜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지근성 등 빈민의 성격결함과 행동을 고치는 것이 빈곤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그렇게 빈곤문제를 바라본 세력에게 빈곤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고 따라서 '발견'돼야 했다. 원래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던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빈민은 사라지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전례 없는 국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박탈과 불행이 일반화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찰스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도 런던 동부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이다. 일련의 사회활동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빈민들의 실상을 고발했고 빈곤문제에 대한 논쟁을 펼치게 됐다. 그런데 이런 빈민에 대한 묘사는 이방의 세계, 딴 세계를 그리는 듯한 것이었고, 그것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 내용, 연애소설을 들고 있는 독자들이 읽을 수 없는 참혹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은 소설이 아닌 사실이었고, 선정적이라 할지라도 빈곤이라는 최악의 사회문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계절노동이나 아주 불안정한 경제 부문에 임시 고용될 뿐이고, 15시간에서 17시간에 이르는 착취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일자리 말고도 아주 과밀한 주거, 부적절한 위생, 높은 아동사망률, 성매매의 만연, 폭력적 범죄와 질병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런던동부에서 빈곤율은 40%에 육박했다. 사적자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빈민의 수가 많다는 것, 빈곤의 원인이 성격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유로운 시장에 내버려 두면 되고, 국부가 증진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았던 논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것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권의 도전을 받게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빈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서울 부랑인의 절규'같은 고발이 더 이상 필요할까? 700만, 800만에 이른다는 빈곤층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개인의 모자람으로 취급하고 여전히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별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면 발견될 것은 빈곤이 아니고 치유될 것은 빈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이고 구조일 것이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The Bitter Cry of Outcast London): 비참한 빈민의 상황에 대한 조사(Andrew Mearns, 1883) (일부발췌)

…최근까지 기독교회는 빈민구제를 일부 외곽조직으로 만족해왔거나 더 나쁘게는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조직도 없는 소수의 기독교인에게 맡겨왔다. 나머지들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지역 방문과 다소 무차별적인 물질적 자선의 배포와 극빈자들이 모이는 몇 개의 방을 여기저기에 개설하는 것에 만족해왔고 그런 일들로는 소수가 구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그 방식에서 선하며 선한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는 가난과 비참함, 더러움과 부도덕으로 아주 음울한 지역의 가장자리만을 건드렸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한다. 사실을 통해 끔찍한 죄악과 비참함의 홍수가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 수위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이 문건은 극빈자의 실제 상태와 가장 효과적인 대책을 찾기 위한 오랫동안의 끈기 있고 진실한 조사의 결과이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기서 주어진 정보는 선별한 사례가 아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거리마다에서 보이는 상태를 단지 드러낸 것이다. 둘째, 절대로 과장하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을 꾸밈없이 서술한 것이다. …


빈민이 사는 곳의 조건

그들의 '집'(home)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들짐승이 사는 굴과 비교할 때 동물이 사는 굴이 더 안락하고 건강한 곳으로 여겨질 그런 곳을 어떻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이들 치명적인 인간의 빈민굴이 무엇이며, 노예선의 복도에서 듣는 것을 연상시키는 공포에 둘러싸여 수만 명이 어디에서 한데 우굴 거리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려면, 사방에서 던져지고 당신 발밑을 흐르는 오수와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유독한 고약한 냄새로 쩔은 골목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골목들 상당수에는 햇볕이 전혀 들지 않고, 신선한 공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으며, 한 방울 청소물의 효능을 알지 못한다.

썩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매 계단마다 빠질 위험이 있고,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려, 방심하면 팔다리나 생명을 잃을 구멍을 남기고 있다. 해충이 기어오르는 어둡고 더러운 복도를 더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악취로 물러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대속한 인종에 속하는 수천 명의 존재들이 무리져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철로 문 아래나 짐수레나 큰 통속에서, 또는 야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잠자리에서건 잠을 자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을 동정한 적이 있는가? 이곳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있는 이들의 운명과 비교할 때 거리의 그들을 더 부러울 정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평방 8 피트가 이 많은 방들의 평균 크기다. 벽과 천장은 오랜 세월 방치돼온 때가 뭉쳐 검은색이다. 머리 위 판자의 깨친 틈 사이로 오물이 스며 나오고, 벽을 따라 떨어지고 있고 어디에나 있다. 창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절반이 넝마나 판자로 막혀있다. 나머지 부분도 아주 더럽고 희미해서 빛이 거의 들어올 수 없거나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열려있거나 깨진 창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그래도 좀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고 다락에 올라간다면 낮은 집들의 지붕과 선반을 보게 되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메스꺼운 공기가 죽은 고양이나 새들의 시체 더미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들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썩고 악취나는 주택의 각 방에는 한 가족 때론 두가족이 살고 있다. 한 위생감독관은 한 지하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 명의 아이, 그리고 4마리의 돼지를 발견했다. 또다른 방에서 한 선교사는 천연두를 앓고 있는 남자와 8번째 해산을 하고 막 몸을 추스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반은 벌거벗은 채 먼지로 뒤덮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한 개의 지하 부엌에는 7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같은 방안에 죽은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또다른 곳에는 가난한 과부와 3명의 아이, 그리고 죽은 지 13일이 된 아이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마부였는데 얼마 전에 자살했다. …초저녁에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어머니가 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부도덕한 목적으로 방을 세놨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어린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시간이 돼서야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침대가 있는 곳은 단지 더러운 넝마와 대팻밥이나 짚단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불쌍한 아이들이 휴식할 수 있는 부분은 더러운 판자 위일 뿐이다. 이 방의 소유자인 과부는 침대만을 차지하고 바닥은 결혼한 부부에게 임대했다. …


빈곤

…우리가 의미하는 빈곤은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빈곤이다.…트위드 바지를 만드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하루에 얼마를 버냐고 했더니 1실링이라 한다. 그런데 하루가 이 가련한 영혼에게 뭘 의미하는가? 17시간이다!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녀는 일한다. 식사할 짬도 없다. 일하면서 빵껍질을 먹고 약간의 차를 마신다.…이들은 가족 소득의 절반을 이런 끔찍한 동네의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고, 일용할 음식과 옷과 연료를 위해 남겨지는 돈은 4다임에서 6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빈민의 고통스런 얼굴은 노예제와 악명 높은 억압의 땅에 비할 바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이러한 빈곤과 타락의 심연에까지 교육법이 미치고 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육법으로 인해 우리가 설명한 이 계급은 잔인한 짐을 걸머져야 한다. 이들에게 서넛의 아이 각각에 대한 일주일에 2펜스나 1페니의 수업료는 그만큼의 먹을 것의 부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빈곤과 지저분함 속에서 사람이 지속적으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의 광경을 대면해야 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해야 할 일

…우리는 국가의 개입 없이는 어떤 효과적인 것도 대규모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일거리가 있는 중심가 근처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기차나 전차로 교외로 나갈 여유가 없다. 어떻게 그들의 야위고 굶주린 몸으로 1실링 또는 그 이하를 벌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는 것도 모자라 편도 3∼4마일을 걸을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노동자 주거법(the Artizans' Dwellings Act)은 빈민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기준에 맞는 주거를 건설한다고 대규모 구역에서 빈민들을 몰아냈지만, 이들 주거의 임대료는 극빈자들의 수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빈민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거의 없다시피한 숨막힐 듯한 곳에 더욱 밀집해 살도록 내몰렸다. 빈민은 비록 그것이 살아있는 무덤 같은 주거라 할지라도 어딘가에 주거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에 부자는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된 부동산을 사들여 그것을 금광으로 바꿔놓으면서 그렇게 빈민의 고통으로부터 더 풍요로운 수확을 거둔다.
국가는 이런 사악한 매매를 빨리 없애야만 하고, 극빈자에게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열병의 소굴보다는 더 나은 곳에 살 권리, 가장 지저분한 야수보다는 더 나은 존재로서 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