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안에 산다. 꽤 걸리지만 전철을 타고 쭉 가면 서울이다. 이 전철을 타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인사동을 다녀오는 게 내 작은 소망이었다. 서울 명동 거리를 꼭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그 소원을 풀었다. 친구들이랑 서울 다녀오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말도 못 꺼내게 하시던 엄마가 잘 다녀오란다. 서울아, 내가 간다~ 명동에서 일본인을 만나면 그동안 갈고 닦은 내 일본어 실력을 보여주마, 움화화화! 그런데 그들이 망쳤단 말이다, 그것도 완전히. 오늘 하루 종일 만난 경찰은, 꿈에 그리던 서울 나들이를 공포영화 체험기로 만들어버렸다.
맨 인 블랙? 서울 인 블랙!
서울이라 그런지, 토요일이라 그런지, 정말 사람이 많았다. 친구들과 역에서 빠져나와 ‘여기가 서울이구나’ 므흣해 하는데, 눈에 떡 들어온 건 번쩍번쩍 빛나는 까만 방패들. 헬멧을 쓰고 최첨단 갑옷 같은 까만 옷을 뒤집어 쓴 경찰들이었다.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경찰들, 양팔 간격으로 넓게 서서 길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완전 깜짝 놀랐다. 뭔 일이 난 줄 알았다. 처음 보는 모습에, 캐쫄아서 눈이라도 마주칠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그런데 다른 이들은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다니는 거다. 순간 영화 <맨 인 블랙>이 생각났다. 바퀴벌레를 너무 끔찍한 외계생물체로 묘사한 게 맘에 안 들었었는데, 여기저기 뭉텅이로 있는 검은 경찰들이 영락없는 바퀴벌레 같았다. 어쩌면 경찰들 사이를 요리저리 피해 다닌 우리들이 바퀴벌레가 된 것처럼 느껴져 서글프기도 했다. 여하튼 검은색을 뒤집어 쓴 서울이라니! 아아 안습이다.
한낮의 황당한 저주
그래도 인사동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까의 경찰 무더기에 대한 충격이 가시려할 때였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 서 있었는데 유독 경찰들이 많았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경찰이라니-_-아까는 눈도 못 마주치겠더니 이제는 나도 익숙해진 듯. 어어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면서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아저씨가 경찰들에게 한 마디 했다, 정말 ‘한 마디’였다. 길거리에 이렇게 많은 경찰들이 나와 있어서야 되겠냐고 한탄을 하셨다. 방패에 헬멧에 완전무장을 하고 곳곳에 서 있는 경찰들을 보면 사람들이 당연히 움츠려들지 않겠냐고 했다. 그런데 경찰이 갑자기 아저씨를 에워싸려는 듯 움직였다.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고, 옆에 서 있던 어떤 누나들은 계속 “어머”를 외쳤다. 경찰이 아저씨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는 말도 못하냐며 버둥거렸고, 누나들도 왜 이러냐고 소리 질렀다. 이때 경찰들이 디카랑 캠코더랑 네 개가 넘는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그 누나들은 더욱 흥분하여 “경찰이 거리의 무법자냐”며, 지나가던 사람이 한 마디 했기로서니 사진을 찍어대는 게 경찰이 할 짓이냐고 했다. 경찰에게 말 한 마디했다고 죄를 지은 양 증거 사진을 찍다니! 나도 슬슬 열이 받는다. 아무리 위에서 시켰다지만 심하게 사람들을 억누르는 경찰이 좀비같다고 여겨졌다. 완전 <새벽의 황당한 저주>다. 아니, 한낮의 황당한 저주다!
서울, 전설의 고향이더냐!
다행히 아저씨는 안 붙잡혀갔고, 어떤 나이 많은 경찰아저씨가 나와서 ‘시민’들 앞에서 괜한 말썽 부리지 말라는 듯 사진기를 내려놓으라 했다. 우리들 눈이 무섭긴 무서운게지! 그래도 길을 건너는데 좀 우울해졌다. 정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잡아가는 세상 싶어 무섭기도 했다.
친구들과 허기진 속을 달랠 겸 분식집에 들어갔다. 갑자기 (아직도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웨~ 알겠습니다”라는 한데 뭉친 아저씨들의 빠른 목소리와 ‘우당탕 척척’ 발 구르는 소리에 오뎅 국물을 쏟을 뻔 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줄 알았다. 군인들 속, 전쟁터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밖을 봤더니 방패로 땅을 긁기도 했다. ‘걱걱’대는 소리까지 더해, 경찰들이 내는 갖가지 소리는 <전설의 고향>에서 백년 묵은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빼먹기 위해 슥슥삭삭 칼 가는 소리만큼이나 무섭게 들렸다. 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하냔 말이다!
지금의 서울에 무뎌지지 말자구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나의 서울 나들이는 이렇게 끝이 났다. 하루 종일 우리가 만났던 경찰은 ‘전투경찰’이라고 한다. 줄여서 전경이라 부른다던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간첩을 찾아내고 막는 일, 나라가 편안하도록 치안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헐, 오늘 서울에서 만난 전경들은 뭥? 사람들을 옭아매고 위협하는 경찰들이 넘쳐나는 서울이라니. 너무 피곤하고 섬뜩하다. 다시한번 서울 나들이 어떠냐면, 완전 ‘비추’다. 당분간 서울 가고 싶은 마음은 쏙 들어갈 것 같다. 그렇다고 서울은 그렇구나, 내버려둘 수도 없고 헐(내가 뭐 공포영화 주인공처럼 히어로는 아니지만). 무뎌지기도 어렵겠지만 무뎌지지 않아야겠지. 움츠려드는 마음을 서로 달래며 계속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공포영화 같은 지금의 서울을.
덧붙임
괭이눈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