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서 언니는 한참을 웃더니 설명을 해주었다. 서러운 기억 때문에 우는 건 맞단다. 그러나 그 서러운 기억이라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전생이라든지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젖을 빨다 뺏겼을 때, 졸린데 쉽게 자지 못할 때, 혹은 기는 연습을 하다 머리를 찧었을 때와 같은 것들. 은별이를 서럽게 하는 기억은 바로 그런 것들이라 한다. 28개월의 아이나 서른아홉 살의 나나 일흔한 살의 엄마나……, 살아온 만큼의 깊이로 기쁨이나 슬픔이 작용하는 것이라 한다. 문득 나의 우물을 본다.
나의 얕은 우물에 비친 용산의 비극
2009년 1월 19일. 그 날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다. 그리운 선배가 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왔고 나는 선배와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아직 젖을 먹어야하는 은별 때문에 외출 없이 지내던 나날이었다. 오래 전에 잡힌 계획이라 남편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이른 용무를 보고 집으로 왔고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대학로까지 어떤 길이 빠르지? 버스로 갈까, 지하철로 갈까? 아침 일찍이니까 버스가 빠르겠지. 자문자답하며 설레던 아침. 결국 나는 지하철을 타야 했다. 2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고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짝을 맞춰 택시를 타고 떠나갔다. 끝까지 기다린 몇 명만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는 또 가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가 말씀해주셨다.
“데모 때문에 한강대교부터 차들이 못가고 있어요”
승객들은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데모냐고 투덜댔고 나 또한 의아해했었다. 결국 나는 걸어서 지하철을 탔고 한 회 뒤의 영화를 보았다. 한 회 뒤의 영화를 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날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셨다. 선배에게 큰애의 학창생활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이제 막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거라는 각오를 말했으며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영화에 대한 넋두리를 털어놓기도 했다. 나의 우물은 그만큼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다섯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날 기사 아저씨가 전해주었던 데모의 진상을 알았고 평범한 이웃에게 닥친 갑작스런 불행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 남편과 함께 용산구청 앞을 지나다 떼잡이 운운하는 간판을 보고 어이없어 하긴 했었다. “공공 기관에서 저런 표현 써도 되는 거야?” 그렇게 웃으면서.
가난의 상징, 철거민
용산을 알기 전까지 철거나 철거민은 나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그 단어는 10여 년 전의 어느 겨울을 생각나게 한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이라 청량리 철거 지역에 자주 갔었다. 뜨끈뜨끈한 장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규찰을 돌고 돌아와서 끓여먹었던 맛있는 라면. 잘 익은 김치. 정다웠던 아저씨, 아주머니들. 나는 곧 졸업을 했고 그 곳을 떠나왔다.
내 기억 속의 철거민들은 빈민 지역에 사는 세입자들이었으며 공장에 나가거나 노동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몰아내는 정부의 주택정책에 분노하긴 했으나 어쨌든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이웃들의 비극
그러나 용산은 내게 충격이었다. 정말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떵떵거리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진 분들이셨다.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그 공간을 위해 그 분들은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 지역이 주목을 받고,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데에는 바로 그런 분들의 노력이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나가라고 한다. 그 노력과 그 시간과 그 돈에 훨씬 못 미치는 보상액을 제시하면서 나가라고 한다. 시사 프로그램을 보는데 유가족 중에 한 분이 말씀하셨다.
“가게 얻고 꾸미고 하는 데 1억 5천이 들었어요. 그런데 보상금으로 2,500만원을 준대요. 그걸로는 포장마차도 못 해요”
수천 만 원의 보상금 차액을 보전하려던 분들이, 조금이라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던 그 분들이 망루에 올랐고 그리고 참변을 당했다. 그리고 8개월, 추석을 앞둔 지금, 여전히 그 분들은 그 곳에 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등짐처럼 지고 갈 부끄러움, 나의 바람
어느 날 회의에서 진척 없는 작업에 대해 보고하던 선배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영화 작업을 하는 게 맞는 거냐? 해도 되는 거냐?”
평범한 이웃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가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들. 나는 아직도 1월 19일 아침, 정체된 버스 안에서 조바심치던 나를 부끄럽게 기억한다. 이 부끄러움, 이 미안함, 이 분노를 등짐처럼 지고서 살아가지만… 참 무기력하다. 그리고 내 아이들을 본다.
항상 즐겁고 더 깊이 슬퍼하며 자기들만의 감정에 흠뿍 빠져서 살아가는 순진한 영혼들을. 너희들은 앞으로 점점 더 자랄 것이고 더 깊은 슬픔, 더 환한 기쁨들을 알아가겠지. 나는 너희들이 세상을 넓고 깊게 알아갔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슬픔, 자기만의 기쁨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누군가가, 제 값이 매겨지지 않는 노동의 대가로 야위어 가는 누군가가, 천지간에 몸 하나 누일 데 없어 떠도는 누군가가, 강한 자들의 파워게임 속에서 삶의 자리를 위협받는 누군가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우물이 깊으면 물은 차고도 향기롭고, 사람이 깊으면 삶은 넉넉해질 것이다. 너희들이 향기로운 우물 같은 넉넉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부끄러움을 곱씹으며 이 글을 쓴다.
덧붙임
류미례 님은 여성과 장애와 가난에 관심을 두고 비디오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