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4동, 또 다른 서러움
“이게 처음 당하는 일이면 오히려 덤덤할 텐데 한 번 당했던 일이잖아요. 그 새벽에 용역들이 새까맣게 올라오는데, ‘아, 오늘 죽었구나.’ 그 생각이 딱 드는데 우리 애 생각이 나더라고요.”
4월 25일 새벽, 상도4동 산 65번지 주민들은 미리 예고된 강제철거를 대비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미 대대적인 강제철거의 끔찍함을 2008년 10월 10일에도 겪었다. 김영순 씨의 집도 그 때 부서졌다. ‘설마 사람이 사는 집까지 부수겠어?’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에 김영순 씨의 기대는 집과 함께 무너졌다. “엄마, 우리 집 어디 갔어?” 학교에서 돌아 온 초등학생 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지난 달, 다시 또 시작된 강제철거를 막아보겠다고 그 캄캄한 새벽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섰다.
“2008년도에 엄청 얻어맞았어요. 정말 죽을 만큼 맞았어요.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때 우리 애기 아빠도 갈비뼈가 나갈 정도로 엄청 맞았고. 근데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 가서 산대요? 너무 억울해서 나중에는 아픈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맞고 구르고 했으니 얼마나 더러웠겠어요. 그래도 씻고 다음날 또 나섰어요. 그러니까 거기 있던 용역이 그럽디다. 아줌마 못 나올 줄 알았다고. 그래서 그랬죠. ‘야, 누워있을 데가 없어서 왔어. 여기가 내가 사는 내 집이라 왔어!’.”
20여 년간 살았던 집이 철거되고 한 달 반 뒤에 김영순 씨의 남편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씨의 남편은 병원에 입원할 때도 이곳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아직 싸움도 안 끝났는데…….” 딸과 둘이 남은 김 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돼 임대아파트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보증금을 빌려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강제철거를 당한 집 보증금과 이주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생긴 빚 이자 갚기도 버겁다.
“그래도 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에요. 미안하죠.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잖아. 그렇지 않겠어요? 진짜, 못 배우고 가난한 게 죄지. 있는 놈들이 만든 법이라 그런가 우리 같은 사람들 위해주는 건 하나도 없어요.”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이들이 희망을 키우던 달동네
생지옥 같은 강제철거의 광풍이 불기 전, 고정득 씨는 이곳에서 희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고 씨는 98년 IMF(아이엠에프) 외환위기 당시 남편이 하던 사업이 망해서 밀려나듯 이곳으로 이사 왔다. 수중에는 달랑 2백만 원밖에 없었다.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가파른 달동네로 들어오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고 씨 가족이 가진 돈으로는 다른 곳에 가 살 방도가 없었다.
“여기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데 초등학교 다니는 제 아들이 그림을 그려서 뽑혔대요. 교실에 전시됐다고 해서 가봤다가 마음이 짠했어요. 글쎄 양변기가 있는 집을 그려놓은 거예요. 우리 집에는 없었거든요.”
양변기도 없는 달동네지만 고정득 씨는 성실하게 일을 하면 생활이 안정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전세금 마련해 나가자고 남편과 약속하며 시작한 달동네 생활이 벌써 14년째다.
2008년 강제철거 직후에 남편을 떠나보낸 김영순 씨가 남편과 20년 간 살아온 터도 이곳 상도4동 산 65번지다. “저나 남편이나 못 배우고 가진 것도 없어서 벌이가 시원찮았죠. 백만 원 조금 넘게 벌어서 생활비 쓰면 남는 것도 없고. 그러니 뭐 어디 다른 데 나가 살 엄두가 나겠어요?” 연탄보일러도 없어서 겨울이면 동상에 걸려서 발이 퉁퉁 붓기도 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김 씨에게는 따뜻한 ‘우리 동네’였다.
“이 동네는 누구네 집을 가든 수저만 더 올리면 밥을 먹었어요. ‘아유, 나 커피 마시고 싶어’ 그러면 같이 커피 마시고, 비 오면 부침개해서 나눠 먹고. 없는 사람들이 인심이 더 좋아요. 이 동네가 그랬어요.”
산 권리와 살 권리의 충돌
김영순 씨가 “집은 더러워도 인심은 좋아!”라며 자랑했다는 ‘우리 동네’를, 서울시는 2007년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주민들은 내심 기대했다.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면 161세대 정도의 공공임대 아파트도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서 “집은 더러워도”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였다.
하지만 이곳을 개발하려는 시행사의 입장에서는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시행사는 이 지역 땅을 사들여 민영개발로 진행하려고 애썼다. 민영개발을 하면 일정 부분을 공공임대 아파트로 건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영개발로 진행하려는 시행사의 로비가 밝혀져 땅 소유권자와 조합 간부, 구청 공무원, 도시정비업체 간부, 시공사 간부까지 구속됐다. 서울시와 시행사 세아주택, 이 지역 땅 소유권자였던 지덕사(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 종친회가 관리)간에 복잡한 소송도 오갔다.
복잡한 소송 끝에 시행사는 법원으로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퇴거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철거를 진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주민들을 빨리 내쫓아야 이익을 하루라도 빨리 낼 수 있는 시행사와 내쫓기면 갈 곳이 없는 주민들 간의 이해가 이곳에서 부딪히고 있다. 산 권리와 살 권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좋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깨지고 있더라고요.” 김영순 씨는 자신들이 너무 순진했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끔찍했던 강제철거와 용역들의 일상적인 폭력을 경험하며 주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물러날 수 없는 이유
“예전에는 머리에 띠 두르고 그러는 사람들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2008년에 그렇게 당하고 보니까 어느새 제가 이 (투쟁) 조끼를 입고 싸우고 있어요.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도 그래서 하게 됐고요. 정말 그렇게 당하니까 오기가 나요.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런데 이번에 이놈들이 또 밀고 들어왔어요.”
이 동네로 들어오는 걸 부끄러워했다던 고정득 씨는 강제철거를 접하며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사업 실패로 밀려나듯 들어온 동네지만 이제 더 이상은 밀려날 곳도 쫓겨날 곳도 없다. 시행사에서 제시하는 이주비는 2백만 원. 여기에 보증금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갈 곳이 없다. “사실 싸우는 게 겁나서 다른 곳에 살만한 데가 있을지 알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지하방도 구하기가 어려워요.”
김영순 씨의 딸은 엄마가 철거민 투쟁을 계속하는 걸 걱정한다. 2008년 강제철거 때 너무 처참하게 맞고 굴렀던 부모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다치지는 않을까, 그렇게 또 당해서 엄마까지 잃는 건 아닐까 걱정돼 엄마가 몸살이라도 나면 밤새 옆에서 얼음찜질을 하며 간호를 한다.
“우리는 나이도 먹고 괜찮다고 하지만 애들이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하나요? 우리 처지는 우리만 알죠. 갈 데 없는 우리 사정 얘기하면 시행사는 그래요.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더 오기가 나요.”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올려달라는 전세금을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선배는 이번에 이사를 준비하며 혼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집 없는 설움 때문에 1~2년에 한 번씩 이렇게 떠돌아 다녀야 한다는 게 서럽다”는 선배의 말이 상도4동 주민들의 사정을 들으며 떠올랐다. 땅이 상품이 되고 그걸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밀려나고 쫓겨나는 유랑민 신세를 요구받는다는 점이 비슷해서였나보다. 다만, 이제는 갈 곳이 없는 상도4동 주민들의 사정이 훨씬 절박하다.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그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그들이 임대아파트 입주를 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덧붙임
곰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