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이 치러진 날, 개표 방송을 틀어놓고 있다가 윤석열이 추월한 것을 보고 TV를 껐다. 새벽녘 잠에서 깨 휴대폰으로 포털에 올라온 당선 확실을 보고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예상 못한 게 아니었음에도 기분이 몹시 나빴다. 탄핵촛불로 집권하고 다수당을 차지했지만 아무 것도 안한 민주당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고만 말하기 어려운, 패배감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혹스러웠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감정을 곱씹는 게 필요했다.
몇 라운드가 아닌 새 시즌이구나
2013년 이맘때 “2라운드다”라는 제목으로 활동가의 편지를 썼던 게 떠올랐다.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12월의 대선날 울컥하는 마음에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 겨울 대한문 앞을 지켜온 ‘함께 살자 농성촌’ 천막으로 갔다. 쌍용차 정리해고, 용산 강제철거,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그리고 핵발전소) 투쟁이 한데 모여 이어온 농성이었다. 험난한 날들을 예상하며 그날 농성 천막 한켠 함께 자리를 지키고 싶었던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날 농성장 당번이 아닌 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두런두런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활동의 2라운드라는 링 위에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갔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2020년에서야 마지막 복직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간 쌍용차는 매각으로 뒤숭숭하다. 2016년까지 주차장으로 쓰인 남일당 현장은 이젠 높다란 빌딩이 들어차 아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강정 해군기지 앞에서 매일 평화의 백배를 이어가는 지킴이들은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함께 한다. 밀양에 들어선 송전탑은 이제 신규 발전소 계획에 따라 전국 곳곳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
문재인 정권의 지난 5년 동안 적폐청산과 개혁을 내세우며 이명박-박근혜 정권과는 ‘다른’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말만 둥둥 떠다녔을 뿐, 우리의 삶은 나아진 게 없다. 기득권 정치일 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숱하게 겪은 시간이었음에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2기 촛불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시민사회진영에서 흘러나왔다. 정권재창출이냐 정권교체냐 그들만의 승리에 대한 셈법이지만, 민주 대 반민주로 구도화 하면서 두 선택지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로 모든 것이 좌우될 것처럼 이야기하며 말이다. 또다시 반보수 전선에 함께 서는 것으로 같은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입장 발표를 제안했다. 대안을 만들고 세력화 하며, 제도 개혁을 넘어 체제 전환이라는 목표로, 이를 포기하거나 의탁하지 않는 사회운동을 다짐하자는 것이었다.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니 패배감이란 감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의 이유를 무엇으로 삼는지, 그 위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보를 이어갈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위한 우리의 정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대선 이후 마주하게 될 시간이 몇 번째 라운드라기보다는 앞선 흐름과 맞닿아있으면서도 ‘단절’되는 새로운 시즌이어야 할 것 같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만드는 여정
예고편처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시즌을 먼저 열어준 소식이 있다. 문정현 신부님과 평화바람에서 제안한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 순례 ‘봄바람’이다. 3월 15일 강정 해군기지 앞에서 출발한 순례단은 “지금 당장 기후정의!” “차별을 끊고 평등으로!” “전쟁 연습 말고 평화 연습!” “일하다 죽지 않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전국의 투쟁 현장들을 만나고 있다. 순례기간 중반을 넘어서는 동안 제주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곳곳 투쟁현장을 방문했고, 강원도-경기도-서울 일정으로 4월 30일까지 이어진다. 봄바람 순례단과 함께 하는 길동무들이 모인 소식방에는 매일 현장의 목소리가 올라온다. 몰랐던 현장도 많고, 끝났을 거라고 짐작했던 현장도 많았다. 어떤 정권이었던 간에 제대로 응답한 적 없는 외면 속에서, 하루하루 투쟁의 시간이 더해지고 있었다.
소식 올라오는 것만 보다가 지난 4월 8일 순례단의 청주 일정에 함께 했다. 청주가 SK하이닉스 왕국이라는 것도, 미세먼지 수치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기후위기에 앞장서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LNG발전소를 SK하이닉스는 제 공장을 돌리기 위해 짓는다는 계획이고, 지역사회의 반대 목소리를 외면하며 지자체는 기업을 지원하고 떠받들기에만 여념 없다. 청주를 오가는 길 산업단지 공사현장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지역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지만 쓰레기로 엄청난 돈을 버는 폐기물 처리시설이 의무적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경제 규모는 4%가 안되는 데 전국 쓰레기 용량의 18%(주로 산업폐기물)를 처리하는 민간 소각장이 엄청나게 들어선 청주, 주민 건강피해가 드러나며 소송을 제기하고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도 재벌기업인 SK하이닉스 앞에서는 굳게 침묵만 지킬 뿐이다. 청주지역 순례 마지막 일정으로 고 변희수 하사의 봉안소를 찾았다. 15년째 차별금지법 제정을 유예해온 시간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는 시간을 빼앗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국회 앞을 지키며 단식농성을 시작하는 동료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억과 다짐을 약속했다.
4월 30일 함께 모인 우리가 다른 세상을 만들자
오늘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싸움의 현장들, 세상이 변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싸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우리가 변했고, 그렇게 우리가 변화한 세상에서 다시 오늘을 싸우고 살아간다. 그렇게 다른 세상을 만나온 봄바람 순례가 마무리되는 4월 30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다른 세상을 만드는 여정을 시작하는 자리로 4.30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 집무실이 들어설 예정인 용산에서 1시에 모여 행진해 보신각에서 다른 세상으로 함께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라는 외침은 봄바람에 실려 더 크게 더 널리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