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나의 운동 이력은 ‘정치세력화’라는 말과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 노동해방운동 등 진보적 사회운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한 나는, 80년대 말 급속히 늘어가는 노동자 조직화를 목격하고 운동선배들이 이제는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며 열심히 ‘볼세비키는 어떻게 의회를 활용했는가’와 같은 책이나 문건을 탐독하고, 정치세력화의 중요성을 밤새 토론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변혁의 중요한 전략으로 생각하던 것과 같이 여성운동에 참여한 이래로도 나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에 서 있고, 현재 진행되는 여성정치세력화에 삐딱한 눈을 뜨고 보게 되었다.
정계에 부는 ‘여풍’, 삐딱하게 보는 사연
지금과 같은 여성 정치세력화에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된 것은 우선 현재 여성의 진정한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한국 사회 정치 지형에도 이제 ‘여성’의 등장은 그다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만 해도 여성정치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국가의 성평등 지수가 높아진 것이라 인식되던 측면이 강했다면, 이제는 비록 아직 그 수에서는 미미하지만 여성의 정치진출이 당연시 여겨지는 상황까지 왔다.
첫 여성총리 한명숙, 비록 당선은 안 되었지만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강금실 등으로 상징화된 현재 정계의 ‘여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위시한 여성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명숙 의원을 새총리로 지명하자마자 환영 성명서를 내고, 인사청문회에 참관하여 총리 인준에 압력 행사를 하는 등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한명숙 총리의 인준을 기존의 정치와 다른 새로운 여성정치시대의 서막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상 한명숙 총리에게서 여성운동이 기대할 것은 무엇인가? 기대가 무엇이었건 사실상 한명숙 총리의 정치이미지는 모성적 푸근함의 이미지가 강하고, 정치적 색채나 총리의 행보에서도 여성주의적 관점을 찾아보기도 힘든 상황이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강금실은 어떠한가? 그녀가 가진 건강한 날카로움은 '여성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로 이미지화되었고, 그 결과는 참패다. 물론 강금실 후보의 참패가 ‘여성화된’ 이미지로 승부수를 던진 탓만은 할 수 없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로 전술을 구사한 강금실 캠프는 여성을 ‘여성’일 때만 인정하고, 정치인 혹은 냉철한 지식인일 때 거부 혹은 부정하려하는 작금의 세태에 편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 내에 머물다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회적 상징’ 이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성평등한 사회, 성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여성가족부가 생기고 국가페미니스트(페모크라트, 여성관료)가 등장해서 여성에 대한 의제를 다루는 상황이 되었다지만, 현재의 여성정치세력화는 여성의 권리를 ‘생물학적 여성’의 범주에 한정하여 주장하고 있다. 기존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어떻게 여성의 권리로 확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전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간의 여성운동이 여성의 정치세력화 및 여성적 관점의 정치 구현을 위해 노력했던 것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다. 여성정치세력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각의 페미니즘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어떤 성(性)을 가졌느냐에 의해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존재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작금의 여성정치인들의 행보와 국가의 여성정책은 오히려 기존의 왜곡된 여성성을 강조하는 방향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여성에게 일정한 권리를 이양하는 수준이다. 여성의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할 때 양육의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양육의 문제를 여성의 일로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여성억압적인 가족문제의 본질보다는 건강한 가족을 만들자는 것은 여성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국가정책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어떻게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이룰 것인가를 더 깊이 고민하기보다 끼어들기 전략으로 정치세력화에 동참한 것은 결과적으로 진정 여성의 정치세력화였나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생물학적 여성’의 정계 진출만으론…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불평등한 한국 여성의 지위와 지나치게 낮은 대표성이 현실인 상황에서, 여성운동이 여성의 대표성 제고를 위한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중요한 과제로 제기해 온 것의 중요성을 탈각시킬 의도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여성의 삶의 질 변화와 성차별적 가부장제 사회에 어떤 변화의 물결을 일으켜 주었나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세력화 자체만을 옹호할 순 없다.
정치세력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여성의 정치세력화의 또 하나의 실패는 바로 단지 ‘생물학적 여성’들이 더 많이 진출해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제적이고 남녀 구별이 확연한 우리 사회에서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도 그녀가 ‘사회적 남녀차별 구조 하에서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고, 아무리 최상류층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생활해온 여성이라 하더라도 ‘성별 의식’에서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란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한 여성주의 지식인은 설사 그들이 여성주의적 의제를 내걸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 주장의 내용과 방식은 남성과 다르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이들이 여성을 대표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가 아닐까?
심지어 여성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한명숙 총리도, 민변에 있을 때 여성인권을 변호한 강금실 전 서울시장 후보도,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인 현 여성가족부 장하진 장관도 ‘국가’라는 권력적 구조 안에서 맥을 못 추고 자신들의 여성주의적 관점을 정치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생물학적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과연 여성에게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여성이면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현재의 여성정치의 내용을 보라. 대체로 중산층 이상, 정규직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여성’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여성의 사회적 계급성과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힘을 보태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노동해방을 위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작은 힘이나마 보탰던 나의 20-30대의 경험이 남성중심적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에서 좌절되었던 경험을 여기에 다 풀어놓을 수 없으나, 그래서 드는 생각은 여성의 정치세력화 문제에서도 낙관보다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어떤’ 여성을 대표해서, ‘어떤’ 여성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보다 심도있게 고민하는 가운데 진정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과 같이 가부장적 성격의 국가권력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여성들의 힘을 모아내어 스스로 세력화되는 것으로서 전략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덧붙임
◎ 정주연 님은 세계화반대여성연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