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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로 물구나무] 아파트 광고, 낯 뜨거운 속물스러움

요즘 TV 방송에서는 아파트 광고가 ‘절찬리’ 상영 중이다.
재개발 붐을 타고 일어난 고급 아파트 열풍으로 예전의 투박스런 ‘XX건설’ 따위의 이름에서 벗어나 ‘갈색돌’, ‘롯데성’, ‘명예로운 곳’ 등의 브랜드를 내걸고 아파트 이미지 고급화에 힘쓰고 있다. 아파트가 실용적으로 얼마나 좋아질지(당신들 기준에서)는 모르겠지만 광고를 그렇게 많이 ‘때린다’면 아파트 값은 분명 올라가겠지.



이 아파트는 상품이 내세우고 있는 이름처럼 일반인들로서는 넘기 힘든 그들만의 성(Castle)을 짓고 살려는 ‘상류사회’의 주거취향과 소비욕구를 담아 “백만 명 중의 하나를 위하여 지었다“고 광고한다.
이러한 광고 속에서 누구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살만한 집,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공간으로서의 집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집이 꿈이 되고,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발버둥친다. 집이 갖는 본연의 의미는 온데간데없고 건설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한 다른 의미의 집만이 뇌리에 박힌다.



‘높은 동네’ 아파트는 아내의 S라인까지(!) 잡아준다고 한다.
아파트에 갇힌 그녀는 그 속에서만 꿈을 꾸며 친구와의 약속도 쉽게 거둔다.
“응, 나 그냥 집에 있을래.”
능력있는 남편이 출근할 때 ‘착한 아내’답게 챙겨주고 아파트 동호회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가끔은 봉사활동도 한다.
건설자본이 만들어낸 아파트의 이미지를 좇는 여성들은 그 곳에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가부장제의 틀 안에 보기 좋게 포장된 모습으로 갇혀 있을 뿐이다.



다른 한 건설회사는 “…○○○○의 고급스러운 내부를 보여주지 않고도, ○○○○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의 질을 이야기함으로써…”라고 광고하고 있다.
그 아파트에 살기만 하면 품격이 높아져서 밖에서도 서로를 보기만 해도 알아볼 수 있다는 발상이다. 한마디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는 얘기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우리의 존재와 일상, 노동이 담기는 공간이다. 집에 대한 우리의 생각,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 집을 통해 만들어가는 관계는 바로 우리 자신을 말해준다. 하지만 사는 집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신분과 계급까지도 보여준다는 생각, 굳이 집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만 봐도 그 사람이 사는 집-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계급을 알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엔 감추고자 하는 부끄러움도 없이 천민자본주의를 깊이 내면화하고 있는 전형적인 속물 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집에서 살 권리를 갖고 있다. 점유의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주거비는 부담할 만한 비용의 수준이어야 한다. 하지만 건설자본의 ‘뻔뻔한’ 광고들 앞에서 인권으로서의 우리의 권리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움츠러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노골적인 속물들의 속삭임에 움츠러들지 말자. 어깨 펴고 당당히 거대 건설자본에게 빼앗기고 있는 우리들의 주거의 권리를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