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의료급여 수급권자인 노숙 당사자 20명과 함께 인권교육을 진행했다. 노숙인들 스스로 건강권을 인식하고 본인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는 힘을 북돋우고자 준비한 자리였다. 건강을 ‘타고난 복’으로서나 개인적으로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 문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고민에서 시작해, 건강이 권리임을 인식할 것을 이번 교육의 목표였다.
건강,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
두세 명씩 짝을 지은 다음 역할을 나누어 맡아 그 인물에게 주어진 직업이나 주거 등의 조건에 맞춰 건강 상태가 어떠할지 우선 고민한 후, 바닥에 미리 표시된 여섯 개의 건강선 중 한 곳에 선다. 각 역할 별로 몇몇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데, 그때그때 그 인물의 건강은 어떤 영향을 받을지 논의해보고 그 만큼 건강선을 따라 왔다갔다 움직인다. 대학생 윤정씨(설정)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주거 환경 때문에 원래의 건강선에서 세 계단이나 내려갔고,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농사꾼 병철씨(설정)는 약값의 본인부담금 증가 상황으로 건강선이 두 계단 내려갔다. 반면 보건복지부 장관 너시민씨(설정)는 황사 때문에 건강이 한 계단 내려갔다가, 새로 개발된 값비싼 감기약 덕분에 건강선이 다시 올라가기도 하였다. 다른 이들은 비싼 가격 때문에 엄두도 못내는 감기약이었다. 이렇듯 가진 돈의 액수에 따라 건강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고 저마다 나름의 좌절과 분노를 느끼는 등 사회(환경)가 사람들의 건강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건강’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만 잘 보살핀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 환경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서 누구나 건강할 권리를 가지며 이를 정부에 요구할 수 있다는 데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돈 없는 사람 무시하는 병원에 할 말 있다!
그 다음으로는, 위풍당당 큰 덩치를 뽐내는 병원과 그 앞에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는 사람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풍선에 채워보기로 했다. 의료급여 수급권자인 노숙 당사자 ‘나’는, 들어가면 제대로 치료해줄까? / 병원이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 없는 사람이라고 차별하고 약도 성의 없이 처방하고 말이지 / 우리가 갈 수 있는 병원은 몇 되지도 않아 / 그마저도 불친절하고…없는 게 서럽지 / 가족도 돈도 없고 가긴 가야 하는데, 행려자로 가긴 눈치가 보여서… / 병원비가 너무 비싸 등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돈이 없어도 정성껏 치료해줘야지! / 아픈 사람을 위해서 보건복지부가 제대로 해야 해 / 진료할 때 ‘행려자’와 ‘일반인’을 구별하지 않고 통일되도록 ‘행려기록’을 없애자 / 주거가 없어 의료 보장에서 배제된 노숙인의 건강권도 보장해야해 / 병원비가 조금 낮아졌으면 좋겠어 / 병원에 진 빚이 너무 많으면 빚을 탕감해주는 게 필요해 등 나름대로의 대안들을 꼬물꼬물 풀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기는커녕 누군가의 건강권은 후퇴시키는 의료급여제도의 개악을 강행하고 있다. 우리는 의료급여제도 개악 내용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교육을 마무리지었다. 시종일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 꿈틀이는 교육 후반에 들면서는 작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혀를 차며 화를 내기도 했다.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인권교육을 위해
노숙 당사자들과 인권교육을 진행하기로 계획을 잡은 후, 평소와는 달리 너무 긴장돼 한동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교육을 준비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를 쓰듯 해야할 말 하나하나까지 쓰고 또 쓰고,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 긴장이 원인이 지금 당장 직접적/즉각적으로 인권침해를 당할 수 있는 인권침해 당사자들과의 교육에 대한 부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녀들의 반인권적 상황이나 권한강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게 또다른 묵직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제3자인 나는 그/녀들의 상황에 대해 과연 제대로 공감하고 있는 걸까? 뭔가 좀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또는 그들이 그런 것을 바라지 않을까? 결국 누구의 문제를 넘어 모두의 문제라는 것까지 담을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이번 인권교육 후 “프로그램을 같이 하면서 각자 담고 있던 얘기들을 점점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에 힘이 났다”며 “(이번 활동을 통해) 지금 마음속에 일어난 슬픔의 힘, 분노의 힘을 의료급여제도 개악에 반대하는 행동으로 만들어내자”고 말하던 한 꿈틀이, 활동 내내 유독 덤덤하게 있다가 마무리 즈음에 작은 한숨 내쉬던 다른 꿈틀이, 옆에서 그런 그를 툭툭 치며 “이대로 있을 순 없다니까”라고 소곤거리던 또다른 꿈틀이가 떠오른다. 그/녀들의 절박함 속에서 스스로의 권리 옹호를 이야기하는 인권교육이, 말만 동동 떠다니는 ‘바른 길 안내표지판’ 같은 교육이 되면 안될텐데…….
하지만 분명한 건, 교육 내내 갸우뚱거리다 마무리 활동 때 터졌던 누군가의 한숨이, 누군가의 소곤소곤 말소리가 ‘말’뿐인 인권교육을 넘어서기 위한 꿈틀거림으로 느껴진다는 것! 꿈틀이와 돋움이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인권교육을 통해 엮은 양탄자에 더불어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인권옹호자로서 교육 밖 현실로 뛰쳐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실천의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아직 잘 정리되지는 않는다. 꿈틀거리는 인권교육을 날으는 양탄자로 만들기! 꿈틀이들과 돋움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양탄자에 몸을 실으려면? 현실에 램프의 요정은 없으니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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