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이 글은 남자 화장실에 붙어있는 계몽적(?) 표어다. 여성인 내가 남자 화장실에 갈 일이 없으니 이런 표어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한 방송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표어를 발견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자 강사는 화장실에서 이 표어만 보면 나오던 오줌도 안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심리적인 억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한 이 강사는 여성과 남성의 감정표현이 사회에서 수용되는 방식에 따라 평균수명이 달라진다고 설파했다.
그 프로를 보면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말한 시몬느 드 보봐르의 말이 떠올랐다. 또 다른 한편, 남성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가령 남자는 일생을 통해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얘기를 여성인 나도 참 많이 듣고 자랐다. 태어날 때, 부모가 죽을 때, 나라가 망할·때. 그러나 현실에서 과연 그럴까? <한겨레21> 384호(2001년 1월)에 실린 기사를 보면, 남성들의 경우 울고 싶을 때 참는다는 비율이 80%에 이르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38.5%의 응답자는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31.8%의 응답자는 “자주 울지 않아 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위 표어를 보면서 나는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 억압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 역시도 성 역할에 따라 심리적으로 고정되고 왜곡되어 있어서 안타깝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으로서 어떤 조건이나 감정 상태가 되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을 규범으로 묶어둔 억압은 ‘가부장제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강해야하고 상처나 외로움, 고통을 드러내서도 안 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반복해서 습득한다. 그 가운데 타인에 대한 지배-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를 합리화하는 가부장제의 규범을 ‘남성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가정, 학교, 직장, 군대에서 학습 받는다. 이렇게 내면화된 가부장성은 결국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인간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나고 위계화된 힘의 논리는 남성 내부에서도 지배와 착취의 그물로 얽혀있다.
이 표어를 보면서 남성해방(?)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광고의 카피처럼 남성의 눈물이 향기롭고 때때로 울 수 있는 남성이 훨씬 매력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이 이 글을 읽고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어서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다고 해서 가부장제와 남성의 지배질서가 사라진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럼 왜 이 글을 시작했냐면, 여성주의를 고민하고 실천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나는 살면서 언제나 남성이라는 존재와 부딪히는데 그들이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매우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를 고민하다가 남성들이 이 사회에서 수용되어온 가부장적인 남성성에 갇혀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 틀로부터 나와 “나는 이런 존재야”라고 말하는 남성과 여성주의에 관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