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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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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실 (하)

<편집인주> 지난 11월 1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유서의 필적이 김기설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인권오름>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남은 과제를 살펴본다.


"잠시 후면 검찰청으로 떠나게 될 지금의 제 심정은 진실하기에 떳떳하면서도 한편으로 하소연할 길 없는 억울함과 무거운 마음이 교차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결백한 저에게 유서대필자, 자살방조범이라는 범죄자의 굴레를 씌우려드는 공권력에 맞서 제 양심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무고한 개인이 권력의 힘에 의해 끝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강기훈 씨의 ‘검찰 출두 성명서’ 중에서)

강기훈 씨는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이 끝난 뒤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 24일 검찰에 자진 출두할 때까지 그는 명동성당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검찰을 비롯한 정권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검찰의 조작과 언론의 일방적 보도 속에서 그에게 씌워진 유서대필 혐의는 그를 비롯한 범국민대책위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점점 굳어져갔다. 이미 김기설 씨 필적과 강기훈 씨의 필적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에 감정의뢰를 하고, 중요 참고인이었던 이 아무개, 홍 아무개에 대한 강압 수사를 진행했다.

김기설 씨의 유서

▲ 김기설 씨의 유서



진실 차단 위한 검찰의 행태

특히 검찰이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홍 씨의 경우 1991년 5월 13일 연행된 이후 15일 밤 검찰수사관과 집에 잠깐 들린 시간을 제외하고 17일까지 약 100여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강압과 협박’으로 홍 씨의 허위진술을 얻어냈다. 그런 뒤에 곧바로 재판 전 증인신문을 통해 홍 씨의 진술을 ‘증거’로 보전해놓고 그가 나중에 진실을 말하기 어렵게 1달 이상을 검찰의 보호 아래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재판 전 증인신문은 변호인의 조력 없이 행해지는 등의 문제가 많아 후일 ‘슬롯머신사건’과 관련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그런 홍 씨는 1993년 10월 11일 검찰청 민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내 수첩에 적힌 김기설 씨의 이름 전화번호는 강 씨가 적어준 것이 아니었으나 검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해 검찰의 의도대로 진술했다”고 폭로하면서 2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려고 했으나 검찰수사관이 하루 전날 집으로 찾아와 압력을 행사하여 출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1991년 12월 4일 1심 재판부는 강기훈 씨의 자살방조 혐의를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검찰의 수사는 심각한 위기에 부닥쳤다.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강기훈 씨의 필적과 유서가 같다고 감정한 김 씨는 오랫동안 뇌물을 받고 감정을 해온 혐의로 1992년 2월 17일 구속되었다. 김 씨는 1980년에도 허위감정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동료 감정사의 감정으로 풀려난 바 있으며, 유서대필 조작사건 이후인 1998년에도 토지사기단과 결탁하여 감정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김형영 씨는 소송 중인 양쪽 당사자로부터 돈을 받기도 했다.

그의 뇌물수수 사건에 대해서 검찰은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없었다”라며 수사 개시 6일 만에 서둘러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강기훈 씨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신속한 수사였다. 전력도 있고 당장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했던 것인데 그의 감정결과는 신뢰할 수 있다는 이런 억지는 그대로 2심 재판부에 의해서, 그리고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한겨레신문>은 1991년 2월 19일자 “국과수 ‘거짓감정’ 수사 뒷얘기” 기사에서 “1월 중순께 문서위조단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방경찰청 특수기동대 소속 수사관들이 김형영 씨에게 인쇄소에서 인영 등을 복제해간 사실을 추궁하며 1시간가량 연행조사를 벌이자 김 씨는 이 사실을 강기훈 씨를 기소했던 서울지검 형사1부에 연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서 풀려난 김 씨는 며칠 뒤 형사1부에 조사받은 사실을 알렸고, 이에 발끈한 한 간부검사는 경찰 간부에게 ‘만약 김 씨가 허위감정과 관계없는 것으로 나타나면 경찰 몇 명은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 호통 치며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귀띔이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김형영 씨가 연락한 형사1부는 강기훈 씨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강신욱 검사가 강력부장에서 옮겨가서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검찰은 이런 뒤에도 <한겨레신문>이 감정을 의뢰한 사설감정원을 압수수색하였고, 1993년 10월 23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압력을 가해서 방영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SBS의 이 프로그램은 1998년에서야 방영될 수 있었다. 이처럼 검찰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힘으로 막았다. 검찰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압력을 행사했을까?

1991년 당시 유서의 필적을 감정했던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필적 등 감정의뢰 회보'

▲ 1991년 당시 유서의 필적을 감정했던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필적 등 감정의뢰 회보'



“범죄자는 강기훈이 아니라 검찰과 법원이다”

이런 강압, 왜곡수사를 벌였던 검찰의 기소 내용을 법원은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1심, 2심, 대법원은 모두 강기훈 씨의 자살방조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의 담당 재판부는 박만호(주심), 김상원, 박우동, 윤영철 재판관으로 이루어졌고, 이중 윤영철 재판관은 나중에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1992년 7월 24일,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신뢰하여 강 씨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하였다고 인정하고, “자살방조죄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성립하는 것으로 그 방법에는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며 “피고인(강기훈)의 경우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도운 것이 명백하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고 밝혔다. ‘정신적인 자살방조’를 처음 인정하였다는 대법원의 이 판결로 1년 1개월 동안 ‘공권력의 권위’와 ‘운동권의 도덕’의 대결은 공권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강 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변호인단은 “진실을 짓밟히는 우리의 고통은 한 순간일 것이나, 진실을 짓밟는 자들에 대한 양심의 역사적 심판은 영원할 것”이라고 상고이유서에서 밝혔지만, 대법원은 이런 항의도 무시하고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1992년 7월 24일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확정했던 1975년 4월 8일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다. 역사는 분명히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오심이었음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그에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다.

이날 판결에 대해 당시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1992년 7월 24일은 대한민국 법원이 스스로 범죄 집단임을 선포한 날로서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오늘 정해진 각본에 따라 우리 사회의 양심과 진실을 세 번째로 짓밟았다. 그러나 강기훈에 대한 대법원의 이 의기양양한 유죄 확정선고는 실은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어야 할 법원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정권의 주구로 전락한 법원의 판결이 강기훈을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소리 높여 외친다. 강기훈은 무죄이다!”라고 강조했다.

강기훈 씨는 “계속 관심 가져 주십시오.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1994년 8월 17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드레퓌스 사건’처럼 끝내 승리할 진실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12년이 걸렸다. 그가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받고 ‘악마도’란 섬에 수감되었을 때 에밀 졸라는 적극적으로 그의 진실을 밝히는 투쟁을 전개한다. 에밀 졸라의 눈부신 활약과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 언론인들, 그리고 그의 형의 헌신적인 활동은 어떤 위협 속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하여 당시 반유태주의 폭동이 빈번하던 상황에서도 그 사건이 조작되었고, 드레퓌스는 무죄임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된다. 결국 드레퓌스는 프랑스 각계와 세계 여러 나라 행동하는 양심들의 항의에 의해 재심을 받아들이지만, 첫 번째 재심에서는 10년의 유죄로 감형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도 졸라는 격렬하게 항의하는데, 드레퓌스는 이런 노력으로 가석방으로 풀려나고 이후 재심을 통해 완전히 무죄임을 확인 받게 되는데 그때가 1906년이었다. 레종도뇌르 훈장도 수여받고, 군에도 소령으로 한 계급 진급하여 복귀하게 된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도 이제는 재심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고, 재심결정이 나면 다시 법원의 재심과정을 거쳐야 한다. 검찰은 이미 이에 대한 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검찰 조직의 명예를 걸고 이 사건의 재심부터 막아볼 속셈인 것 같다.

그러나 지난 16년 6개월 동안 무죄석방공대위, 진상규명공대위를 구성하여 진실을 규명하려고 노력했고, 2005년 3월에는 현재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실규명 대책위원회’를 탄생시켰다. 이들 대책위원회들에는 강 씨의 무죄를 믿는 종교인, 법조인, 정치인, 재야운동가 등이 대거 참여해 왔다. 물론 그의 곁에서 가장 아파하고 함께 했던, 지금은 암투병 중이신 어머님이 계신다. 16년여 동안 이어진 이런 진상규명 활동도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물다. 무죄석방공대위에서는 수사, 공판자료와 진실규명과 관련한 활동, 언론보도 기사 등을 모아서 각권 900쪽 전후의 전 3권으로 이루어진 『유서사건 총자료집』을 1993년에 발간하기도 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사건을 환기시키고, 강신욱 대법관과 관련 검사들의 승진이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 이런 모든 노력의 끝에 지난 2006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했고, 마침내 지난 11월 13일 진실의 일부일 뿐이지만 유서가 대필되지 않았다는 상식의 승리를 얻어냈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아직도 현직에 남아 있는 검사들(신상규 광주지검장, 안종택 서울북부지검 검사장, 남기춘 서울북부지검 차장검사, 곽상도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이 있고, 퇴직한 검사와 법관들은 전관예우를 받으면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단 2심 배석판사였던 부구욱은 현재 영산대 총장으로 있다). 검찰과 법원이 지금이라도 자발적으로 진실을 인정하고 당시 사건의 기획과 조작의 과정, 검찰 위의 관계기관대책회의, 그리고 청와대와의 관계를 밝히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진실의 공방이 법정에 이루어질 것이고, 이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진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간 무죄석방 공대위부터 대책위마다 주창해왔던 말처럼 “진실은 승리한다”라는 믿음을 갖고 이후의 과정을 준비해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 12년의 몇 배만큼 길어지더라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우리의 행진은 계속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