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호부터 놀이터 섹션에 새롭게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에 대한 고민을 담는 [페미니즘인(in)걸]을 연재합니다. 성별화된 가부장 사회에 가장 많이 저항하는 사람은 약자인 여성과 성소수자입니다.
이번 기획에서 독자 여러분은 가부장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주체인 청소녀들의 사회를 재구성해보려는 시각과 행동, 고민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획에서 독자 여러분은 가부장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주체인 청소녀들의 사회를 재구성해보려는 시각과 행동, 고민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 또는 청소년인권.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겠노라고 야심차게 기획을 던졌는데,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할 말들은 많지만 딱 잡히는 게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쉽게쉽게(?) “청소년”인 동시에 “여성”인, ‘소녀’(십대 여성, 청소녀, 여성 청소년, 여러 가지 말들이 가능하겠지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소녀’라는 이미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소녀’라는 이미지
‘소녀’는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더러운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선하고, 때로는 정의롭다. 예를 들어 2008년을 달군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촛불소녀’를 생각해보라. 촛불소녀를 단지 촛불집회에 10대 여성 청소년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것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정치적 순수성과 순수한 정의감, (두발규제, 교복 등의 규범을 준수하면서도 순수한 열정으로 거리로 나온) 착한 촛불 등의 이미지와 메시지가 있었고, 이를 통해 촛불집회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촛불소녀뿐 아니라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예는 너무나 많다. 어린 소녀의 순수한 눈망울을 강조하는 CF에서,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악마나 외계인을 무찌르는 소녀들에게서, 소녀들이 세계를 구원하거나 가족/친구들을 구원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소녀들은 순수하고 ‘비정치적’이며 정의로웠다. 이런 이미지는 사실 ‘어린이’, ‘아동’, ‘청소년’(청소년의 경우 위태롭고 충동적인 이미지와 순수한 이미지가 ‘미성숙’의 이름 아래 엮여 있다)의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여성’이 결합된 ‘소녀’에서는 그것이 더욱 강화된 그리고 좀 더 특별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사회 속에서 소녀의 이미지는 모순적이다. 순수성의 이면에는 성욕/성애의 대상인 소녀가 존재한다. 이른바 로리콤(로리타콤플렉스)이 대중문화 캐릭터 취향을 가리키는 말 중에 한 축을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앞서 언급한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에서도 남성들은 세일러복이나 드레스, 미니스커트 등으로 변신(코스프레)하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성적 긴장과 욕망을 느낀다. 나이 어린, 젊은 여성들을 가리키는 “영계”라는 표현이라거나, 청소년 성매매의 경우는 또 어떤가?
이러한 욕망의 대상인 소녀의 모습은, 순수성의 이미지와 배치되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여성이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자 성적인 상품이 되는 사회에서, ‘순수’의 이미지는 성욕의 대상으로 재배치될 수 있다. 남성들은 지켜줘야 한다는 ‘부성본능’(??)과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에 자극하는 대상인 소녀들의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남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재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여성의 젊음을 여성의 주요 상품자원으로 만드는 사회 풍조를 강화하고 확대한다.
청소년과 여성은 둘 다 ‘사회적 약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둘은 사회에서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당하는 동시에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당하고 있으며, 약한 존재, 좀 더 순수한 존재, 사적인 존재(가정/가족)로 위치 지워지고 있기에, 그 둘의 이미지는 쉽게 결합될 수 있다.이 결합은 ‘소녀’라는 또 다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이미지를 낳는다. ‘소녀’는 청소년인 동시에 여성인 존재이며, 그 둘의 결합 속에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소녀’는 더욱 순수(사회적 무지, 약함)하고 때로는 (순수함의 환상 안에서) 선하며, 동시에 더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미지(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인기 있는 ‘소녀’들
‘소녀 아이돌’들은 ‘소녀 소비’의 모양새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민여동생’ 문근영이나 보아 때도 연예계에서 이런 트렌드는 있어왔다. 그들은 순수하고 착하면서, 사랑-연애에 대한 열정과 순정을 가지고 있고, 적당한 ‘섹시함’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문근영 시절에는 좀 더 지켜주고 싶은 순수한 ‘여동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됐으며 보아의 경우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좀 더 ‘섹시함’의 비중을 늘려가는 정도였다.
최근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카라 등에 이르러서는 ‘소녀 아이돌’들은 섹시함이나 귀여움 등을 더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모두 더 노골적으로 ‘소녀’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기획인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원더걸스는 짧은 교복치마를 코디하는 등 섹시한 ‘영계’로서의 컨셉에 좀 더 비중을 두었고, 소녀시대는 ‘소녀’로서의 귀여움, ‘사랑스러움’을 좀 더 강조한 정도랄까. 순수한 이미지와 성욕/성애/섹시함 사이의 줄타기와 긴장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인기는 ‘소녀’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 없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 또 다른 ‘국민 여동생’, ‘국민 요정’ 등으로 떠오르고 있는 김연아의 인기도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김연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물론 부단한 연습 끝에 이루어낸 피겨스케이팅 실력 덕분이다. 하지만 만약에 김연아가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국민 영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지금 김연아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피겨스케이팅 자체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남성 스케이터는 김연아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느낌의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김연아를 보는 시선은 훌륭한 스포츠인에 대한 존경이라기보다는 기특함, 귀여움, 사랑스러움에 더 가깝다. 나이가 적은 여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업적을 이루더라도 ‘소녀’의 이미지 안에 포섭되고 마는 것일까?
‘소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러한 ‘소녀’의 이미지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영화, 소설, 만화, 광고, 온갖 재현물들 속에서 ‘소녀’의 이미지가 유포된다. 이런 ‘소녀’의 이미지는 소녀들의 삶을 규율하는 역할까지 한다. 치마 교복을 입고 온갖 두발/복장/자세 규제를 당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거나 하면 여학생이 조신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교사들에게 들어야 하는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삶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등의 아이돌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청소년들이 있다. 이런 ‘소녀’의 모습이 바람직한 것이고 예쁜 모습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청소년’들에게 남성들의 입맛에 맞는 모습이 되라고 권한다. 그 말에 따라,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가진 인간 상품으로 살아남기 위해 여성 청소년들은 ‘소녀’가 된다. ‘소녀’의 이미지는 이렇게 소녀들의 삶을 왜곡시키고, 이런 여성 청소년들은 다시 ‘소녀’의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보부아르를 패러디하자면,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소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소녀에 대한 도전이 필요한 때
‘소녀 권하는 사회’는 청소년들과 여성들이 처해있는 사회적 지위와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만들어진 ‘소녀’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는 청소년들, 여성들, 소녀들의 삶의 현실을 은폐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들을 소비시키는 역할과 기존의 여성/청소년상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우상(아이돌)이 된 소녀’들에게 맡긴다. 그렇기에 ‘청소녀니즘’ 그리고 페미니즘은, ‘소녀’의 이미지에 맞서서 좀 더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전에 여성단체들이 <‘소녀’가 아닌 ‘쏘녀’>라고 외치며 강하고 적극적인, 그리고 기존 ‘소녀’의 틀을 벗어난 여성 청소년 상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소녀’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덧붙임
공현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