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달기 - 기억의 방을 하나씩 열어보니...
자존감을 움틔우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알아야 자존감을 향상시킬 교육 프로그램 구성도 가능한 법. 지난 3월 11일~12일 이틀간 열린 ‘장애인권교육 매뉴얼 워크숍’에서는 인권교육이 목표로 하는 자존감 향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가능한지를 탐색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교육 참여자들에게 종이를 나눠준 다음, 기억의 숲을 더듬어보면서 자존감이 향상됐던 순간들을 적어보라고 요청했다. 쓱싹쓱싹 순식간에 여러 개를 적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참 동안이나 기억을 더듬느라 진땀을 빼는 사람도 있었다.
종이에 적힌 사연들을 비슷한 것끼리 분류해서 게시판에 붙인 다음, 하나씩 살펴보았다. 진행자는 각 사례들을 소개할 때마다 공감도 해주고, 그 사례들이 왜 자존감 향상을 가져오게 되었는지 밑바닥 맥락도 함께 짚어줬다. 간혹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 사연이 있으면 주인공을 초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다.
“저는 양쪽 발이 어려서부터 퉁퉁 부어있었어요. 정맥이 부족해서 발이 계속 붓고 오래 걷지 못하거든요. 어려서부터 제 발을 보고 오빠들이 엄청 놀려댔어요. 초등학교 때 합창단 지휘를 맡으라고 했는데, 퉁퉁 부은 내 발이 사람들한테 보일까봐 두려워 지휘하는 것도 포기했었죠. 그런데 그렇게 밉상이었던 내 발을 성인이 되어서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또 남편이 내 발을 소중하게 마사지 해주고 사랑을 나눌 때도 부은 발부터 애무해줄 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사람들한테 ‘같이 해요. 같이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요.”
= (진행자) 자기 몸이나 느낌을 직면했을 때,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격려 받았을 때 자존감이 향상되는 군요. 관계 속에서 지지받을 때도 중요하고요.
“10대 때까지 자신을 참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둘째딸이라 차별도 받았고, 아빠가 술에 취해서 엄마를 때릴 때면 정말 참담했죠.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다, 우리 집만 왜 이리 불행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게 나만의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가족이라는 주어진 조건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됐죠. 그때부터는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똑바로, 즐겁게 볼 수 있게 됐어요.”= (진행자) 내 상황이 개인의 문제, 우리 가족의 문제로만 보일 때는 스스로를 계속 할퀴게 되잖아요. 하지만 구조로부터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면 달라지는 지점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을 잘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때 뿌듯해요. 커뮤니티 빌더(community builder)라는 새로운 리더십 개념도 있잖아요. 내가 혼자서 이끌어간다는 느낌보다 다리 역할을 잘 해서 우리 조직이나 모임 분위기가 좋아질 때 기분 좋죠.”
“교육을 끝마치고 나서 ‘선생님과 공부해서 좋았어요’ 라는 말을 들을 때요.”
“예전에 상담해줬던 내담자가 나중에 밝아진 모습으로 찾아왔을 때요. 상담할 때는 죽겠다는 심정을 털어놨었는데 제가 조언을 해줬어요. 나중에 인생역전을 이룬 다음 찾아와서 고맙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더 고마웠죠.”
“인권교육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줄 때요.”
= (진행자)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뽑아내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때 자존감도 높아진다는 거네요.
“장애인교육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엄청 감격했죠. 그 법이 사실 장애인 부모들이 만들어낸 법이거든요. 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부모들이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고 엄청 고생했어요.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법이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죠.”
“병원에서 근무할 때 간호사 파업을 했었어요. 환자를 볼모로 파업한다는 지탄이 쏟아졌는데도 결국 버텨냈고 8시간 근무제를 지켜냈어요. 우리가 해냈구나, 너무도 당연할 걸 인정 받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너무 기뻤어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땄을 때요.”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여성을 때리길래 그 집으로 쳐들어가서 항의도 하고 경찰도 부르고 그랬어요. 보복을 당할까 무섭기도 했지만요. 언젠가 술집에서도 술에 취한 남성이 폭력을 휘두르길래 사람들이랑 같이 제압을 했어요. 폭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 상황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여성으로서) 내게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뿌듯했죠.”
= (진행자) 자기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거나 그 힘을 성취로 연결시켰을 때가 자존감을 높여주는 거네요. 또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이 함께 외친 내용이 인정받고 사회적 성취로 연결되었을 때 개인의 자존감도 높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권교육을 받으면서요. 그동안 내가 차별받아왔던 것들이 잘못된 것이었고, 어떤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응하면 될지를 알게 되는 기쁨. 나를 지지해주는 정보들을 만나게 되니까 자존감이 높아지죠.”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처음 만났을 때요.”
“남편과 의견 차이가 심했는데 대화를 하다가 결국 내 말이 맞다고 결론 났을 때요.”
“회의에서 내 말이 먹힐 때.”
= (진행자) 자기를 지지해주는 정보나 사람을 만났을 때군요.
“집에서 독립했을 때요.”
“사회나 조직에서 주어진 길을 그냥 걸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요.”
= (진행자)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해나갈 때 우리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는 모양입니다.
더불어 날갯짓 - 자존감 Up! 일곱 빛깔 무지개
참여자들이 적어준 사연들을 크게 분류해보니 자존감을 움트게 만드는 거름들이 대략 일곱 가지 정도로 분류되었다. ①자기 존재, 자기 정체성과 직면하기 ②자기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구조적) 시선과 만나기 ③독립적인 삶 꾸리기 ④타인으로부터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지지받기 ⑤타인에게 기여하기 ⑥지지받고 친밀한 관계망 형성하기 ⑦개인적, 집단적 성취감 느끼기.
이렇게 일곱 가지 거름들을 뽑아보고 나니 각 거름들은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기보다는 서로 어우러져 있는 하나의 무지개임을 알게 된다. 흔히 생각하듯 자존감이 홀로 일구어낸 ‘개인적’인 당당함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역동 속에서 빚어지는 당당함이라는 것도 보인다. 자기 존재와 직면할 수 있는 힘은 자기를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나 관계를 경험할 때 가능하다. 또한 억압받는 사람들이 집단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단의 일부로서 자기를 정체화하는 것과 아울러, 독립적인 삶을 걸어갈 수 있는 힘과 타인에 대한 기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자양분 삼아야 한다.
머리를 맞대어 - 무지개를 좌표 삼아 세부안 그리기
‘장애와 자부심’(Disabled and Proud)란 모임에서는 장애인의 자부심을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인지적 부분에서의 다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장애가 다양한 사람의 모습 중에 일부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장애에 낙인을 두는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이며, 오랫동안 장애억압적인 사회가 규정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믿음과 느낌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이 자신을 부정하는 생각과 느낌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이루는 일곱 빛깔 무지개를 만나야 한다. 자연의 무지개는 아무리 쫓아가도 잡을 수 없지만, 자존감이라는 무지개와는 누구나 조우할 수 있다. 그 만남을 풀무질하는 것이야말로 인권교육의 존재 이유이다. 이제는 장애인, 여성노인, 빈곤청소년, 비정규직 노동자 등 각 사람들이 자기 처지에 맞게 자존감이란 무지개와 조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나가야 한다. 세부 교육 안을 마련할 때 오늘 발견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좌표 역할을 해줄 것은 틀림없다.
덧붙임
배경내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