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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유혹] 삼켜야 했던 덩어리를 게워내며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읽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월동 성당으로 모였다. 그들은 종교 집회를 보러온 것이 아니었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종교도 다른 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촛불을 들었다는 것이다. 촛불에는 정부를 향한 그들 개개인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촛불들은 성당에서 농성 중인 ‘촛불의경’을 보호하며 정부를 규탄했다.

촛불의경 이길준은 성당지하 2평 남짓한 방 안에서 깊게 침묵했다. 사람들이 외치는 전의경제 폐지, 이명박 타도 등의 구호는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부차적인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뱉어내려 했다. 그 ‘무언가’는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채 목구멍 속으로 꿀렁, 삼켜졌다.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의 혀는 굳어갔다.

조은과 길준

▲ 조은과 길준


길준이는 내 오랜 친구다. 농성의 대부분을 그의 곁에 있었고, 그의 순간을 함께 했다. 당시 의경이었던 그는 촛불집회를 진압하는 도구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역을 거부했다. 기자회견을 열었고, 신월동 성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농성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촛불시민들과 공명해서 내는 목소리도 있었을 것이고, ‘촛불의제’를 넘는 그 무언가의 목소리도 있었을 거다. 그는 분명 ‘촛불의경’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길준이의 목소리는 촛불의경으로서, 농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으로 한정됐다. ‘촛불의경’이라는 테두리가 쳐진 순간부터 그의 다른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병역거부자가 된 순간부터 그가 가진 언어의 상당 부분은 말해지지 못한 채 삼켜져야만 했다.

병역거부자 임재성의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는 병역거부자라는 틀에 갇혀 뱉어내지 못한 이런 덩어리들을 보여준다. 책은 굳건하고 위대한 신념의 촛불의경 이길준이 아닌, 선택의 순간에 타협과 거부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모순된 인간, 나약하고 여린 인간 이길준을 드러낸다. 그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병역거부자의 이면을 보여준다.


병역거부자의 소견서에는 빈번하게 들어가는 단어가 있다. ‘양심의 자유’, ‘반전평화’와 같은 맥락의 단어들이다. 전략적으로 ‘대체복무’를 끌어 쓴 소견서도 ‘1기’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평화의 전사’가 돼야만 했다. 신념의 단단함을 보여줘야 했고, 모든 순간에 강인해야 했다.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을 끊임없이 검열하고, 타협의 여지없는 순교자의 자세로 병역거부의 자리에 박혀있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여리고 신념의 경계가 유연한, 병역거부자 혹은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많은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많은 언어를 삼켰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표면화된 삼켜진 언어들은 분명 의미가 있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옹호하는 유정민석의 인터뷰와, 타협과 타협의 실패, 갈등과 모순의 끝에 양심의 주체를 선언한 이길준의 인터뷰는 삼켜졌던 언어로서 세상 밖으로 게워내어진다. 게워진 덩어리들은 역사로서의 병역거부 경계를 침식한다. 병역거부의 보수적인 경계를 허문다.

나 또한 병역거부 소견서를 쓰면서 언어를 삼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대체복무’, ‘전쟁반대’ 등의 단어를 최대한 쓰지 않고 소견서를 쓰려 했다. 반전주의자로서만 내 메시지가 읽히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굳건한 신념을 얘기하기보다 분열되고 모순덩어리인 ‘나’를 드러내고자 했다. 병역거부가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기반에 서있는 실존적 선택임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타협하고 검열하고 삼킨 언어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깊어 보인다. 책은,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삼켜진 언어를 돌아보게 한다. 삼켰던 덩어리를 게워내는 하나의 계기, 촉진제가 된다.

신월동 농성장에서 길준이가 삼킨 언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는 이제 촛불의경이 아닌 무언가로 변모했고, 농성장에서 그가 삼킨 언어는 지금의 그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어떻게 변했고 변화해가든 더 이상 언어를 삼켜야만 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가, 병역거부를 넘어 다양한 상황에서 언어를 삼켜야만 했을 이들에게 많은 기여를 하리라 믿는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차례

추천사 십 년이 담긴 책 _ 한홍구 5
책을 내며 12

서장 평화학의 방법론을 모색하며 27

1부 병역거부의 문턱
1장 고여 있는 논쟁, 대체복무제 45
2장 부끄러움을 알기 위한 역사 86
3장 병역거부, 운동이 되다 118
4장 군사주의의 문턱에서 151

2부 병역거부에 공감하기
5장 폭력에 대한 감수성, 마취되지 않는 185
6장 병역거부자의 목소리 219
7장 ‘감히’ 징병제를 논하다 253
8장 병역거부가 서 있는 곳, 그리고 가야 할 곳 282

보론 세계의 병역거부와 평화운동 317

후기: 군대 문제 340
참고문헌 347 | 찾아보기 360
덧붙임

조은 님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이 글은 2011년 3월 13일 구치소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격려와 지지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들은 ‘경기도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3956번’으로 편지를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