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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약국’을 구하라

인도-EU FTA 협상을 중단하고 노바티스 소송을 기각시켜야 한다

인도는 ‘세계의 약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개발도상국에 값싼 복제약을 공급해왔다. 12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는 에이즈치료제의 90%가 인도산 복제약이고, 전 세계 에이즈치료제의 50%를 인도에서 공급하고 있다. 인도는 에이즈치료제 외에도 항생제, 항암제, 혈압약, 당뇨약 등 전 세계 복제약 시장의 20%에 해당하는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인도가 ‘세계의 약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87년에 미국의 일방적인 강요로 물질특허를 도입한 한국과 달리 2005년까지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고, 2005년에 물질특허를 도입했어도 의약품 접근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을 인도특허법에 담아두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도에서는 ‘세계의 약국’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인도-EU FTA(인도-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협상과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인도특허법에 대한 소송이다.

2010년 1월, 인도를 방문한 한국의 활동가들. Drop Novartis' Case(노바티스 소송을 기각하라)

▲ 2010년 1월, 인도를 방문한 한국의 활동가들. Drop Novartis' Case(노바티스 소송을 기각하라)


노바티스 소송 사건의 전말

11월 29일, 노바티스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변론이 예정되어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노바티스와 암환자단체, 인도정부 간의 법적공방은 인도특허법 3조(d)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재판이다. 인도특허법 3조(d)는 우리나라 특허법과는 달리 개량신약이나 기존 의약품의 사소한 변형물에 해당하는 의약품에 대해서는 특허를 인정하지 않고, 기존약보다 개선된 치료효과를 보이는 의약품에 대해서만 특허를 인정하여 초국적 제약회사의 특허독점 ‘에버그리닝전략’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2006년에 첸나이 특허청이 인도특허법 3조(d)에 따라 글리벡 특허를 거절하는 결정을 내렸다. 즉 글리벡(이마티닙의 베타 결정형)이 기존의 이마티닙을 약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허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바티스는 특허청의 결정에 불복하고 인도특허법 3조(d)가 트립스협정과 인도헌법에 위배된다고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마드라스 고등법원과 지적재산항소위원회(Intellectual Property Appellate Board)도 노바티스의 소송은 합당하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노바티스는 2009년에 3조(d)의 해석에 대해 대법원에 소송을 신청하였다.

대법원이 노바티스의 손을 들어주면 당장에는 인도의 백혈병 환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인도에서는 매년 약 2만5천~3만 명의 새로운 백혈병 환자가 생기고, 매년 1만8천 명이 사망을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태국의 백혈병 환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태국에서는 2008년 1월에 글리벡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하여 인도에서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태국정부가 국민건강보험제도를 통해 글리벡을 공급하기에는 약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노바티스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노바티스는 태국에서 연간 가구 소득이 5천5백만 원 이하일 경우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대부분의 태국 백혈병 환자는 노바티스의 무상공급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었고, 태국정부는 무상공급이 중단되지 않는 한 글리벡 강제실시를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인도에서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만들지 못하게 될 경우 노바티스가 무상공급을 지속할까? 노바티스가 무상공급을 중단하면 태국정부가 미뤄두었던 강제실시를 시행하더라도 수입할 복제약이 없다.

노바티스의 소송은 한국에서도

더 큰 문제는 사소한 변화를 가지고도 (혁신적) 신약으로 가장시킨 수많은 의약품에 대해 특허를 부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글리벡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값싼 복제약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고 세계의 약국이 사라질 수도 있다.

노바티스는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제약회사다. 노바티스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도 있다. 2001년 노바티스가 한국에 글리벡을 출시했을 때 한 달에 300만 원이 넘는 약값을 요구했다. 특허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백혈병 환자들은 ‘약값인하’와 ‘보험적용 확대’, ‘글리벡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요구하며 1년 반이 넘도록 싸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복지부는 노바티스의 요구대로 한 달에 270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약값을 결정하였고, 특허청은 강제실시 청구를 기각했다. 당시 일부 환자는 인도제약사 낫코(Natco)에서 글리벡과 똑같은 약 비낫(Veenat)을 한 달에 120달러, 즉 글리벡의 1/20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사회단체에서 ‘글리벡약가인하신청’을 했고 복지부는 아주 미약하지만 약값을 인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노바티스는 소송을 걸었고 아직 진행 중이다. 이렇듯 약가결정과 의약품공급에 있어 특허권자의 독점적 권한이 막강한 상황에서 한미FTA까지 날치기 비준되어 앞날이 캄캄하다.


또 다른 사건, FTA

‘세계의 약국’의 미래를 결정할 또 다른 사건은 인도-EU FTA다. 의약품자료독점권과 지적재산권 집행조치가 포함되어 있는 인도-EU FTA 협상이 3개월 내에 결론이 날 예정이다. 올 초에 서명을 할 예정이었지만 전 세계 환자와 활동가들이 투쟁을 벌이면서 협상이 지연되자 유럽연합은 자료독점권과 지적재산권 집행조치를 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2012년 2월에 예정된 인도-유럽연합 정상회담 전에 협상이 완료되지 않으면 협상을 깰 것이라고 인도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인도-EU FTA 지적재산권 부문 협상이 뉴델리에서 12월 5~9일에 열릴 예정이다.

자료독점권이 부여되면 특허가 없거나 특허가 만료된 의약품일지라도 판매독점권이 생기게 되어 복제약 생산을 못하게 된다. 심지어 강제실시와 같은 특허권의 공공적 사용도 못하게 된다. 인도의 제약회사 낫코는 2011년 8월에 바이엘사가 특허권을 갖고 있는 항암제 넥사바에 대해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값싼 복제약을 인도에서 생산, 사용하기 위한 강제실시로는 처음이다. 최신 에이즈치료제에도 강제실시를 청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인도-EU FTA가 체결되면 도루묵이다. 지적재산권 집행조항은 초국적기업들이 지적재산권 침해를 빌미로 사법절차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민․형사 소송을 손쉽게 제기하도록 하고, 과다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며, 복제약을 위조품으로 간주하여 압류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적재산권 집행조치는 인도의 복제약이 수입, 수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인도정부가 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인도정부가 ‘세계의 약국’을 지키느냐 여부는 전 세계 120개국이 넘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인도-EU FTA협상은 당장 중단되어야 하고, 노바티스 소송은 기각되어야 한다.
덧붙임

권미란 님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