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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선(船)] 공투단도 넘어야 할 게 많은 비정규직 투쟁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탄압 분쇄를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 좌담회 ②

노동운동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어떻게 잘 풀지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고 몸의 문제요, 원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민주노조 사업장에서도 제대로 풀고 있지 못한 것이 비정규직 투쟁이다. 과연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탄압 분쇄를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이하 공투단) 은 어떻게 풀고 있는 것일까. 어떤 느낌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투단과의 좌담회에서 답을 찾아가는 질문을서로 나누었다.
◊ 좌담회 참석자
최일배 ; 공투단장,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위원장, 9년째 싸움 중
김경봉 : 콜트콜텍노조, 정리해고 철회 6년째 싸움 중
고동민 : 쌍용자동차노조, 정리해고 철회 5년째 싸움 중
김은석 : 베링거인겔하임노조, 부당해고 1년째 싸움 중
이수창 ; 골든브릿지투자증권노조 수석부지부장, 1년째 파업 중
이근재 : 골든브릿지투자증권노조, 사무노조연맹 간부
기 선 : 인권활동가, 공투단 참여중
명 숙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윤 미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사진 촬영 및 녹취 정리)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 최일배, 고동민, 기선(왼쪽부터 순서대로)

▲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 최일배, 고동민, 기선(왼쪽부터 순서대로)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김경봉,김은석,이수창,이근재(왼쪽부터 순서대로)

▲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김경봉,김은석,이수창,이근재(왼쪽부터 순서대로)


명 숙 : 얘기를 좀 바꿔서 비정규직 투쟁을 얘기해보지요, 오늘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자인 김수억 동지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공투단에 비정규사업장이 많진 않지만 어느정도 있잖아요. 같이 섞이면서 더 이해하게 된 경험들을 좀 듣고 싶어요. 말로 비정규직 철폐하자, 정규직도 함께 하자는 구호는 많지만 공투단이 느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듣고 싶어요.

이수창 : 기아차 비지회, 현대차 비지회, 재능, 쌍용차 비지회...

고동민 : 이래서 욕먹는 거야. 쌍용차 비지회는 맨 마지막에 말해서.. .*

기선 : 한 몸이라서...

이수창 : 비정규직이 투쟁을 많이 하지 않는 상황인 것 같더라고요. 개인들이 포기하면 끝나는 거잖아요. 그걸 조직화해서 투쟁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고. 하지만 결국은 정규직 사업장이 비정규직 사업장이 되더라고요. 노조 탄압해서 정규직을 해고 하면 다시 비정규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비정규직들은 모래알 같아서 개인이 포기하면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가게 되는 거니까. 비정규직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고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가는 거니까. 오히려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재능교육도 비정규직 사업장이지만 그분들이 사업소득인게 이해가 안 가요. 재능교육의 박성훈 회장과 재능 교사는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어서 사업소득을 받는 거라는 게, 대학 졸업해서 재능교육에 입사를 하면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일 뿐인데... 사용자의 지시를 받는 노동자일 뿐인데 동등한 입장이 아니지요. 우리 사회의 특수한 비정규직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게 기형적이고. 그런 쪽에 대해서 저도 공동투쟁을 하게 되면 해당사업장에 대해서 사전에 공부를 하고 가게 되니까,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비정규직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공투단이 만들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적 불합리함을 많이 깨치게 해준 공투단이 아닌가.

고(故) 윤주형을 가슴에 묻고 비정규직 문제를 말하다

명숙 : 최일배 동지 얘기할 게 있을 것 같긴 한데...

최일배 : 김수억 동지를 만날 때도 그렇지만 공투단에 같이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 동지들을 비정규직이라고 불러본 기억이 제 기억에는 없거든요. 순간적으로 공투단에 비정규직 사업장이 어디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그런데 당장 울산 철탑에 올라가 있는 현대차 비지회 동지들을 보면 비정규직이란 느낌이 오거든요. 김호관 동지를 보면 그런 느낌이 안 오는데. 이 차이는 뭘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보이지 않는 담이라는 것이 있는 한 끊임없이 둘은 평행선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이 담을 없애는 것. 공투단 안에서는 이 담이란 게 없는 상태기 때문에 굳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할 필요도 없게 된 거고.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 같은 경우도 정규직이었지만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간엔 담이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코오롱에 정상적으로 근무할 때, 그때는 젊은 친구들이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게 아니고 군대 가기 전 알바처럼 오는 도급들이나 정년퇴직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와요. 지금 보면 그 사람들이 비정규직인데, 그러다보니까 비정규직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희박해요. 저 사람들은 당연히 저런 일을 해야지. 정규직이 저 일을 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는 고정관념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착각하는 게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이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생각, 이걸 바꾸지 않는 한 죽어도 이 벽이 안 깨지거든요. 나중에 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은 자본인데, 마치 우리 노동자가 우리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처럼.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비교대상의 비정규직이 있는 한 끊임없이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건데 이것을 정규직은 모르죠. 저 같은 경우는 정리해고당하고 공장에서 쫓겨난 뒤에야 비로소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버려야만 궁극적으로 정규직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걸 나중에야 느꼈으니까. 아직까지 현장의 정규직들은 그 생각의 틀을 못 깨고 있는 거죠.

명숙 : 아까 (고동민이) 울컥했던 기아차 윤주형 동지 장례식 때 최일배 동지가 발언을 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내가 정말 깊숙이 생각을 못한 것 같다”며 반성의 말을 한 게 저는 되게 기억에 남거든요. 사실 차별받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깊숙이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투단 하면서 윤주형 동지 장례식만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 경험이나 계기가 있는지 얘기해주세요. 저는 운동이란 게 자꾸 불편한 게 늘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청소노동자 캠페인을 하면서 청소노동자와 같이 하다보니까 달라지는 게 있어요. 점거 농성할 때도 청테이프가 잘 떨어지게 하려고 해요. 왜냐면 청소하시는 분들 힘들 테니까. 그분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죠. 그리고 집회할 때 쓰레기를 큰 용량이 버리면 편하긴 해요. 하지만 청소노동자를 생각하면 작은 용량에 여러 개 해야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요. 사실 이게 불편한 거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바뀌어가는 거죠. 마찬가지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우면서 바뀌어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 바뀌는 순간이나 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공투단에서는 그런 경험들이 뭐가 있었을까? 물론 윤주형 동지 장례식이 가장 컸을 텐데 그런 걸 듣고 싶었어요. 비정규직 사업장이든 정규직 사업장이든 워낙 장기투쟁이다 보니까 그런 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수창 : 비정규직은 자본의 끊임없는 유혹인 것 같아요.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영자 입장에서 전원 다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그 비용을 다 부담하는 것도 불합리할 수 있단 생각이 들거든요. 모든 사람이 다 정규직이라고 한다면 그럼 사회 고용의 유연성도 떨어지고. 사실 우리가 투쟁하는 쪽에 너무 매몰돼 있다 보니까 모든 비정규직이 정규직화 되는 유토피아를 꿈꾸다고는 하지만 그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명백하게 회사가 불법을 저지르면당연히 정규직화로 해결하는 게 맞지만 자본 쪽에서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특히 윤주형 동지 옛날에 보면서, 기아차 내용을 봤거든요. 1사 1노조,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통합하면서 비정규직은 완전히 묻혀버리는 통합과정을 읽어보니까, 만약에 저희같이 80,90명되는 노조는 일일이 돌아가면서 설명할 수 있어요. 집행부 입장을 밝힐 수 있고 설득해나갈 수 있는 과정이 있는데, 대공장 노조, 기아차의 수천 명 노조를 데리고 정규직 8000명에 비정규직 500명이라고 하면 1사 1노조에서 당연히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목소리는 묻힐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건 좀 위험한 얘기긴 하지만 사실 정규직이 절대다수고, 해고된 윤주형 동지나 이석 동지처럼 소수면 어쩌면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수억 동지가 들으면 섭섭해 할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저는 좀 고민이었어요. 가장 기본적 문제는 원청에서 하청을 주고 재하청을 주고 3차까지 내려가서 기아차 입장에서는 3차까지 하청된 노동자가 복직 대상자가 아닐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같이 투쟁하고 있는 동지니까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회사입장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치관에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윤주형 동지 사건이었거든요. 그래서 정규직의 문제, 노동 탄압, 징계 해고의 문제는 오히려 간단한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공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내가 함부로 재단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장례식장에 있었던 여러 가지 다툼도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명숙 : 혼란이 정리 되셨어요?

이수창 : 안 됐죠.

명숙 : 저는 혼란은 되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이수창 : 그렇죠. 당연히 좋은 거고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희생만 강요당하는 것보다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 큰 파도와 충돌해서 불협화음이 나는 건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개인이나 소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다수보다는 소수를 위해서 즉 고통 받는 자를 위해서 같이 힘이 되어준다는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최일배 : 이수창 동지가 얘기한 것처럼 코오롱의 예를 들어볼게요. 해고된 9년이나 10년 전의 예를 들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이수창동지가 얘기한 것처럼 정규직이 규모가 컸고 비정규직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정규직이 결국은 다수인 다수를 위하는 조합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고민인데 문제는 그것이 굳어지다보니까 십년 지나다보니까 역전이 됐어요. 오히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아요.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득권을 갖고 있는 건 쪽수가 적은 정규직. 그때는 정규직이 많아서 기득권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비정규직 수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꼴이 이어지다보니까 숫자는 줄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정규직이 자신들의 이익관계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걸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거죠. 정규직은 숫자가 줄어들고 비정규직은 점점 늘고.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을 정규직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싸움이 발생해서 깨진 사업장들은 그제서야 ‘아차’ 하는 거예요. 우리가 정규직을 보호한다고 했던 것들이 결국은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게 아니었고, 결국은 내 밥그릇과 연결되는 거였구나. 지금 잘 돌아가는 사업장들은 비정규직의 문제가 정규직 밥그릇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결국은 나에게 피해가 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만 가져도 생각이 달라져요. 하지만 오히려‘ 담을 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깨진 사업장은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거죠. 문제는 그 뼈저린 경험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업장한테 얘기하려고 해도 이게 잘 안 먹혀요. 잘 들어가지가 않아. 그래서 규모가 작은 사업장은 조합원 교육이라고 해서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해서, 그나마 마련해주는 사업장에 가서는 그런 얘기라도 해요 최소한.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업장은 아예 차단이 돼 있어요. 얘기조차 하지 못하게끔. 그래서 안타까운 게 왜 우리는 당하고 나서야 그걸 느낄까. 그러면 당하지 않은 사업장들에 이런 것들을 알려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을 하는데.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해보는데. 이 꼴이...

이수창 : 저도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현대중공업은 그렇더라고요. 정규직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 감소가 되는데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정규직의 자녀들이 다시 비정규직으로 가더라고요. 예를 들어 정년퇴임을 앞둔 고위직의 관료들의 직원들의 자녀들은 현대중공업의 비정규직으로 간대요. 그러니까 자기는 정규직을 지켜낼 수 있지만 자녀들은 정규직 담보를 못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만큼 자본에게는 엄청 달콤한 꿀단지가 비정규직이 아닌가.

명숙 : 그게 남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신 것 같은데. 어쨌든 조합원이나 당사자들이 몸으로 느껴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실천, 아이디어는 모두에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선 : 어느 사업장이나 자신의 탄압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비정규직 투쟁의 탄압이란 걸 상상을 초월하잖아요. 물리력도 다르고. 사람에게 주는 모욕도 강해서 사실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기 힘든 거죠. 저는 어제 기륭비정규직노동자들이 복직하는 걸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분들이 그런 싸움을 지켜내고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들을 찾게 하는 걸 보고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백배는 힘들었겠구나. 참 고마운 사람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까 이수창 동지의 얘기를 들으면 슬퍼요. 그러니까, 제일 잔인한 방식인 거잖아요. 사실 저는 비정규직이 제가 원하는 근무형태예요. 원하는 시간에 풀(full)로 일하지 않고 그리고 크게 얽매이지 않으며, 그런데 이건 미화된 말이지 실제로는 풀(full)로 일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일 종류가 다르다고 하지만 실제 다르지 않고 그러면서 임금 차이가 나고. 제일 슬픈 건, 자본에는 그런 이해관계가 관대한 거죠. 자본은 그런 유혹은 포기할 수 없을 거라고 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포기한 것은 어마어마하다는 걸 모르는 거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간에게 등급이 있다고 인정한 거예요.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은연중에 사실은 안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고동민 : 우리가 해고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기선 : 비정규직 싸움이 처절해서 가장 마음이 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대해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차별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건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사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거든요. 사실 정규직이라 이름붙인 사람들도 사실 계약직인 거고 별반 다르지 않아요. 임금만 많을 뿐이지. 실제로 공투단에서는 서로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최일배 동지 말이 너무 좋긴 했는데 사실 뒤집어보면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놓치고 간 싸움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듣거든요.

이수창 : 인간적으로 가까워서 비정규직이라고 못 느낀 게 아닌가.

이근재 :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데, 이 말은 참 안하려고 했는데,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가 원론적으로 다 고민하는 거잖아. 원론적으로 고민해서 원론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를 했으면 철폐를 갖고 민주노조에서 싸워야 하는데 그걸 자꾸 개량화시키니까 자본이 결국은 포섭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 밀리는 싸움을 97년 이후에 계속 해온 거라. 그렇게 왔기 때문에 지금 비정규직 투쟁이 힘들게 됐는데. 예전부터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싸웠다면 지금처럼 힘든 싸움은 안 할 거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비정규직 투쟁은 원론적인 측면에서 들어가야지 자본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들어가면 답은 절대 없다는 거고.

기선 : 희망버스 갔을 때 나이 드신 노동자분이 크레인 밑을 지키면서 김진숙 씨 얘기를 쭉 하다가, 자기는 이번에는 꼭 갚을 거라고 얘기했어요. 자기들이 김진숙이 해고된 이후로 계속해서 회사와 협상할 때마다 회사는 ‘김진숙은 어떻게 할 건데’라고 시작하면서 했다는 거예요. 맞바꾸면서 시작했다는 거죠. 그런데 더는 그러지 않고 갚겠다고 했거든요. 저는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동안 노조가 싸울 때) 가장 어려운 사람을 조건으로 걸고 협상했다는 거죠. 사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저울질이 있다는 거고.

이근재 : 유명자면 유명자지, 특수고용노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아까 기선 동지는 그렇기 때문에 놓쳤을 투쟁이 있었을 거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거기서 결이 다른 게 뭐냐면, 우리는 끊임없이 재능 앞에 가서 특수고용노동자를 정규직화 하기 위해 싸운다는 거지. 우리가 7월 4일부터 지금까지 왔지만 우리는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는 거지. 그런데 투쟁사업장 현장에 가서는 그 요구로 싸웠고 노력했다는 거고. 그래서 이런 정신들이 민주노조 내에서도 계속 체제내화 되고 확대되면 그런 생각이 바뀌면서 투쟁도 같이 묶어지지 않을까? 나는 그게 노동자 계급정신이 복원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거죠.

김은석 : 이번에 우리투자증권이 회사랑 임단협을 하면서 비정규직을 다 정규직화했어요. 그러면 그냥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비정규직이었던 사람의 조직이 커진 거죠. 노동조합에서도 규모가 커지고 조합원이 들어오고 조직도 커지고. 떠나간 노조원 다시 붙잡아서 가입원서 쓰게 하기 힘들잖아요. 안되거든요. 오히려 교섭을 하거나 비정규직을 받아 안음으로써 한 거죠. 다른 싸움은 다 포기하더라도, 임금은 내년에 올려도 되고 비정규직을 끌어올리는 게 정규직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고민해야할 부분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고동민 : 조금 결이 다른 얘긴데, 사실 비정규직 투쟁 하시는 분들 얘길 들어보면 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해고자에 대한 분노도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몇몇 비정규직 동지들이랑 친해지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싸우다보니까 그런 조건이나 편견과 생각들이 엷어지고 이해의 폭이 늘어난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서로 상처받는 얘기 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될 정도의 관계가 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한 번도 (비정규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적은 없는데.

명숙 : 저는 공투단 하면서 믿음이나 신뢰가 서서히 생긴 거처럼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편견이란 게 갑자기 생긴 건 아니라고 봐요 또 하나 모두들 말씀하신 걸 보면 머릿속으로나 원론적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과제가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재능투쟁 가서는 특수고용의 문제, 현대차 가서는 불법파견에 대해 구호외치잖아요. 연대하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된 것 같은데. 그걸 자기 사업장으로 오는 것까지는 덜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놓치지 않는 게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마재원 동지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잘나가는 사무원이었으니까 비정규직하고 정리해고된 사람은 측은하게 바라봤는데 파업이 길어지기도 하고 공투단을 하면서, 사측의 전략이 정리해고를 거치고 계약직이 들어오게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정리해고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다 얽혀 있는 거구나 라는 걸 투쟁사업장 가서 하기도 했지만 사측과 싸우면서도 느끼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얽혀있는데 얽혀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그래서 우리도 긴장하면서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여러 의견이 충돌하면서 굴러가는 공투단

명숙 :얘기를 바꿔서 아이디어나 운영은 어떻게 해요?

기선 : 막 싸워요.

고동민 :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고 우리는 수렴해요. 베링거 일주년이 됐는데 베링거 사장이 '더크'래요. 그때 집회 이름이 '더 큰 일 나기 전에' 였어요. 농담 삼아 얘기한 걸 아 재밌겠다고 하면 하는 거예요. 어떤 얘기든 할 수 있는 게 장점이 아니겠냐. 그리고 열심히 싸운다고 마음먹었을 땐 이견이 없어요. 이번에 좀 싸우자고 하면 그러자, 하거나 이번에 더 싸우자 아니면 이렇게 싸워보자 이런 얘기를 쉽게 할 수 있어요, 공투단이 지금은 좀 침체기이긴 하지만.

김경봉 : 지금은 하도 여러 군데서 사건이 터지니 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쪽에 집중하다가 공투단에 소홀해진 게 사실이에요. 그 전에는 뭔 일을 해도 한마음인 것 같았고 조합원들 다 모이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 일일이 다 추려서 같이 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고. 공투단의 핵심인 것은 정리해고든, 비정규직이든, 특수고용노동자든 간에 이것을 각계로 하나의 요구사항을 놓고 가는 게 중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명숙 : 사전 인터뷰했던 콜트콜택 장석천 동지는 공투단 사람들이 가족같다고 했어요. 쌍용차 (대한문 철거 막으려고) 싸웠을 때보니까 다 공투단 사람들이더라고요. 다들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사건이 생기면 헌신적으로 싸우는 것 같아요.

이근재 : 가족주의가 좋은 건 아니지만.

명숙 : 주의는 아니고요.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의미로 쓴 거라고 봐요.

이근재 : 골든은 항상 배려의 대상이에요. 실질적으로 연행택이 오면 저는 조합원들과 같이 가니까 부담스럽죠. 가서 동지들과 상의를 합니다. 뒤에 있겠다고 하면 이해해주고. 왜 같이 싸워야지 이게 아니라 배려할 때는 배려하고 그렇다고 우리 동지들이 특성상 강한 조가 있고 약한 조가 있습니다. 약한 조는 배려의 대상이지만 강한 조는 나가서 싸우고.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포용의 대상으로.

기선 : 막상 싸우면 그렇지 않아요.

이수창 :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명숙 : 사전 인터뷰할 때 다들 그런 얘기 하더라고요. “승리하는 싸움을 만들기 위해서 골든에 붙어야 한다.”고...

최일배 : 맥을 짚은 얘긴데, 다른 데서 공동투쟁 하잖아요? 공동투쟁이 형성돼 순회투쟁을 하면 그 인원들 내 사업장 와서 한 시간만 투쟁해주면 좋겠다, 이런 기대가 있다 보니까 거기서 하는 공투일정 가보면 전부 여기 찍고 다음 다른 곳 찍고 가는 거예요. 완전 찍고 찍고 가는 프로그램이 많거든. 그런데 우리의 공투단은 그 반대예요. 어느 사업장이 집회에 가서 같이 해줬을 때 그나마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반대인 거죠. 보통 공투단은 내 사업장에 와주세요 인데, 우리 공투단은 어느 사업장에 가더라도 제대로 한번 해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생각이 완전 반대인거죠.

고동민 : 희망 뚜벅이를 하든 광장을 하든, 광장을 하든 처음엔 다 쌍차를 안하려고 했어요. 쌍차가 많이 알려진 게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많이 돌아다녀서 알려졌는데.(대한문 와서) 하면 (자기 투쟁)의제가 묻힌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유일하게 쌍차가 다 깨버린 거예요. 쌍차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선 의제화할 만한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공투단에서 범국민대회 하잖아요. 공지 좀 해요 우리 이때 모이기로 했어요 그때 좀 모여줘요, 이런 정도고. 그런데 되게 그게 저희들한테는 부담이었거든요. 왜냐하면 끊임없이 같이 하자고 여기 대한문 우리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믿는 사람은 공투단 동지들밖에 없어요. 물론 지금 의심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끊임없이 얘기해요 우리 것 아니라고. 당신들이 함께 만들었다고 끊임없이 얘기했거든요.

최일배 : 풍산한테 그런 제안을 했거든요. 오히려 코오롱이 쌍차 대한문에 같이 하면서 코오롱 정리해고 문제가 더 알려졌다. 역으로. 쌍차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싸우고 있나 이렇게 됐다라고 말했지요.

고동민 : 되게 어려운 문제야 저게

김경봉 : 사실 콜트콜텍도 투쟁기간은 길었지만 많이 묻혀있거든요. 다만 홍대 뮤지션들이 도와줬지만 투쟁공간에서는 거의 묻힌 상태거든요. 같이 공동투쟁하면서 어디 사업투쟁하는 델 가면 각 사업장들이 다 거론이 되거든. 이런 사업장은 이렇게 투쟁한다는 게 얘기되니까 많은 효과를 봤죠. 투쟁사업장들이 웬만하면 같이 하면 좋겠는데. 주위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노총에서 전 조합원한테 천 원씩만 걷으면 투쟁사업장 한 곳에 월급주고도 투쟁할 수 있다고 해요. 그만큼 공동투쟁의 의미를 많이들 생각하고 있는 거죠.

명숙 : 공투단 즐거웠던 기억, 슬펐던 기억도 좋고요. 개인적인 얘기를 듣고 싶어요. 각자가 생각하는 연대는 어떤 건지.

김경봉 : 즐거웠던 건 그 안에 투쟁할 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다 추억으로 즐거워요. 그리고 투쟁 보다 시청에서 프로그램 짜서 같이 한 게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 않아요. 한강 철탑에서 투쟁할 때도 지하철 선전전을 많이 했거든요. 조합원 두세 명이 한 칸에 가서 한 사람은 피켓 들고 한 사람은 선전물 주면서, 그걸 새벽부터 많이 했거든요. 그게 기억이 많이 남고.

명숙 :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 없어요? 실천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했던 게 즐거웠다고 얘기해주셨는데, 질문을 바꿔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이근재 : 가슴 벅찼던 것 하나 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여기 당사자가 없네. 창조컨설팅 문제가 붉어져서 창조컨설팅 앞에 타겟 투쟁을 하러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진입 투쟁을 했던 날이었어요. 공동투쟁단 플러스 유성동지들도 같이 와서. 그날 김은석 동지 유성기업 동지와 우리 조합원 한 명이 경찰에 연행돼 갔죠. 그게 세시 반 상황인데. 그날 저녁 대한문에 그 날 김소연 동지가 사회를 보는 문화제가 기획돼 있었어요. 일단 우리 동지들 셋은 연행됐고 대한문도 챙겨야 하고 그럼 우리가 뭘 할 거냐고 회의한 결과가 다섯 시에 영등포 경찰서에서 기자회견을 하자, 몰려가자고 해서 급박하게 돌아간 거죠. 7시 문화제도 또 가야 된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논의했던 건 기자회견은 다 가자고 해서 대오들, 조합원들 다 데리고 기자회견을 가고 무거운 마음으로 대한문으로도 갔고 한쪽에서는 경찰들과 계속 협의를 했고 일단 오늘 중으로 빨리 석방해라 안하면 대한문 있는 사람들 다 간다고 했어요. 대한문에서도 김소연 동지가 계속 선언을 했고 문화제 끝나자마자 영등포경찰서로 달려간다, 그렇게 됐는데 아홉시 반 정도에 동지 세 명이 풀려서 대한문으로 들어온 거죠. 그때 제일 기억에 나는 건 우리 조합원들 어깨가 다 수그러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춤추고 노는 동지들이 있었지만 우리 골든 조합원동지들은 고개 숙이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 힘든 거라. 근데 유성 기업 동지가 영등포 경찰에서 나왔다고 카톡으로 공지를 받으니까 그 순간에 다들 어깨가 일어나는 거야. 기분이 다 업 되고 막판에 동지들이 다 현장에 돌아왔을 때 그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공투단이 그렇게 빨리 대응하지 않았으면 그날 분명히 석방이 안됐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게 아 공투단의 힘이구나. 그렇게 느껴죠.

이수창 : 저는 하나하나 다 기억나는데, 눈물 날 정도로. 진짜. 그 더운 날 쌍차에서 천막치고 싸울 때 땀범벅 되고, 기차놀이하고, 1박2일 모기장에서 잔 기억도 있고, 제가 문화제 사회 봤던 곳인 코오롱이나 콜트콜텍의 문화제, 화장실도 생각나고. 베링거에서 제가 처음 발언했던 곳이 베링거이고, 어느 사업장 어느 집회 어느 문화제 하나 기억이 안 나는 날이 없어요. 재능 싸움 때도 횃불들고 가다가 뻥 터져서.(웃음) 그런 게 눈물과 웃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니까 거의 일 년 다돼 가는데. 하나하나 버릴 수 없는 거잖습니까.

최일배 : 기억 따지자면 많죠. 새누리당 앞에 저녁 열 시 되면 문화제가 다 끝나는 일정인데 천막 치면서 상황이 발생해서 즉석에서 여기서 끝내지 말고 밤을 새야 한다고 긴급하게 대표자들 모여서 논의했는데 즉석에서 오케이 하면서 JW같은 경우에 다른 데 있던 동지까지 불러서 같이 밤을 샐 정도로. 제일 슬프고 아픈 게 JW죠. 세종호텔이 어쨌든 희망뚜벅이 때문에 싸움이 마무리됐다는 마음들이 있으니까 이 동지들이 아직까지 연대를 하거든요. JW도 세종호텔의 경우처럼 연결됐으면 공투단의 좋은 기운들이 파급되고 확산될 기회가 됐을 텐데.. 기쁘고 아픈 게 같이 있는 게 JW.

명숙 : 저희가 좌담을 하게 된 게 그 동안의 연대가 품앗이 연대 혹은 관행적인 연대에 좀 갇혀 있었다면, 공투단이 그런 걸 좀 벗어나는 계기를 실천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하고 좌담회를 한 건데요. 마지막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연대는 뭔지 얘기하면서 마무리를 하죠.

고동민 : 전 늘 마음 내키는대로 얘기 하거든요. 마음이 가는대로, 지침이나 어떤 지시나 일정들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저길 향하면 가야하는데 그게 전 연대라고 생각해요. 그냥 마음 쭉 가서 가면 마음 편해지고 자기가 훨씬 더 이렇게 치유 받고. 그 공간에서 그렇게 했을 때 그러니까 그냥 어떤 지침에 의해서 앉아서 동원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렇게 음 거기서 뭔가를 함께하는 뭔가를 연대라고 생각하고, 여태까지 저도 그렇게 노력하려고 했고요. 여기 있는 동기들도 거의 다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김경봉 : 나는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저 희망광장 때 생일파티를 광장에서 했거든. 뭐 생각지도 않게 나 같은 경우는 인천에서 잠을 잤고 바깥에서 주말에 한번 내려가고 2주에 한 번씩 내려가고 식구들하고 같이 집에 있었으면 아이들이 파티도 해주고 할 건데 이렇게 할 건데, 그런 걸 그렇게 쭉 해왔다가 이제 못하고 못하는 상태에서 그 안에서 그 많은 특히 같이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축하해주고 노래 불러주고 이런 것들이 진짜 너무 좋았던 것 같아.

김은석 : 저도 8월 8일 공투하는 날 제 생일이었고. 그래서 아마 처음으로 그때 했었던 것 같고. 처음 연행 됐을 때는 맞는 줄 알았는데 안 맞아서 놀랐고 두 번째는 3층에서 밖엘 보는데 그 저기 경찰서 3층에서 경찰서 연행되고 나서 창밖엘 보는데 처음에 잡혀갔을 때는 불안하죠. 진짜 오랜만에 잡혀 가는데. 밖엘 보는데 사람들이 쫙 있고 경찰이 그거 또 막고 있고 이거 정말 맘이 편하다. 동지들이 보통은 뭐 큰 집회든 뭐 하면 뭐 울산 동지들이 올라와서 잡혀가면 그 동지들한테는 변호사 붙여주고 일정 때문에 내려가고 뭐 이런 상황인데 공투단이 이렇게 해주는구나 뭐 오래있지도 않겠다. 끽해야 한 시간이지만, 전혀 두렵거나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생각도 들었고 뭐 그런 압력 때문에 그렇게 빨리 풀어줄 수도 있는 것 같구요. 사실 뭐 특별하게 한 것도 없어요.

그리고 연대의 의미는 그러니까 뭐 다들 남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누구는 노조탄압 받고 있고 전체적으로 다 나의 일이기 때문에 이거 뭐 어떻게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하는 것보다 당연히 내 싸움보다 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게 저한테는 내 싸움이니까

이근재 : 특히 대단한 사람들 많죠. 연행 되는걸 쉴 기회로 생각한다는 거(웃음)

기선 : 어느 날 인권 활동가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달 동안 그 얘기를 했어요. 쌍차 대학문에서 덩그러니 앉아서 이렇게 있는 하릴없이 계속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동자를 보면서 저이는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뭘 기다리고 저이가 원하는 건 뭘까. 하면서 뭘 기다리지 이렇게 얘기 한 거예요. 우리는 또 착한 척 하면서 대답을 한 거죠. 우리를 기다리는 거잖아, 이렇게. 근데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아니라고. 거기서 그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근데 어 누가 그렇게 가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그걸 참지 못하는 나같은 거, 이런 게 연대가 아닐까. 그냥 너를 막지 않으면 그 다음은 나야. 라고 하는 순번이 아니라 뭔가 저 사람이 (다치면) 내가 온전치 못한 나라는 생각을 하는 그런 상태가 연대이지 않을까. 라는거고 저는 공투단 동기들이 오늘과 함께 미화되는 건 아니지만.

오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니까 또 새록새록 한데, 사실은 오늘 분명히 저희가 겪는 가장 큰 힘은 정체되지 않는 힘인 것 같아요. 아무리 잘하고 있었어도 그게 또 계속되면 그 다음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기꺼이 지금도 버릴 수 있는 그런 거? 그런데 이제 많은 동지들이, 싸우는 노동자에게 자존감은 최고인데, 때로는 그런 것도 포기하고, 가치도 좀 바꾸려고 서로 노력하는 걸 보면, ‘저희가 잘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은 하죠. 그리고 고동민이도 아까 얘길 못했지만, 이 자리에서 꼭 이름을 남기고 싶은 윤주형 동지를 더 힘껏 함께 지키지 못한 것 그리고 그 남은 과제를 사람들이 안고 가야한다는 것. 그것이 공투단의 또 하나의 역할이라는 것.

명숙 : 김수억 동지가 같이 왔으면 좋을 텐데,....지금도 긴 시간이지만 더 많이 얘기하면 좋았을 텐데, 못해서 아쉽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쌍용차에는 정규직 조합원과 비정규직 조합원이 함께 있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철회 파업투쟁 때도 정리해고된 수많은 쌍용차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사회에 덜 알려졌다.
** 바쁜 투쟁일정에도 긴 시간 함께 해주신 공투단 여러분,정말 고맙습니다.


덧붙임

명숙, 윤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