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20주년을 맞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다시 변혁을 꿈꾸는 인권운동의 질문을 담아 책자를 발간했다. <인권오름>은 그 중 '도란거리다' 장에 실린 글의 일부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일상, 관계, 활동 속에서 어제의 고백이기도 하고 내일의 다짐이기도 한 사랑방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인권오름> 독자들에게도 든든한 기운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언제 술 한잔해.”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말을 참 잘도 날리는 편이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좋아했지만, 거기서 더 좋아한 것은 술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난 사람을 아는 게 무서웠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와의 관계 맺음에서 꼬리표처럼 따라붙으며 묵직하게 누르던 말. 책임.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부담스럽지도 않고 부담되지도 않게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술기운에 오버가 발동하여, 또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여러 가지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곤 하였다.
짧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랑방 활동을 돌아보면 결국 언제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기사를 쓰든, 캠페인을 하든 모든 활동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하였다.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을 쫓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난 늘 선 하나를 그어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넘어가면 안 될 선이자, 누군가 넘어오면 안 될 선.
인터뷰 기사를 쓰고 싶다던 내 말에
자원활동을 해보고 싶어 사랑방을 기웃거렸던 2006년, 국가인권위 용역사업으로 실업계 고등학교 현장실습 실태조사를 진행하는데 조사원으로 함께 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르바이트해야 할 상황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함께하게 되었다. 날도 궂고 참 추웠던 겨울 늦은 저녁에 첫 면접조사 일정을 잡았다. 12시간 일을 하고 2시간이 걸려 퇴근하였다는 그 친구는 피곤한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로 그려지는 실습현장, 그리고 학교는 참 깜깜하였다. 현장실습을 하며 사회생활은 혼자 하는 거라는 얘길 실감하였다며, 학교도 업체도 무관심한 실습생들의 상황을 “버려진다”고 표현하게 된다던 그 말이 쑥 들어왔다. 조사‘일’은 끝이 났지만, 조사문항에 대한 답이 아닌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고 싶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했다. 결국, 인터뷰 기사를 쓰고 싶다던 내 말이 그 친구에게 어떻게 전달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냉담한 반응에 당황하면서, 그리고 그 친구에게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안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디에서 미끄러졌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조사로 만난 짧은 시간 동안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과정에서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난 그 친구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알게 된 이 안타까운 상황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문제적인 현장실습 실태를 자신의 경험으로 이야기해줄 누구로 위치 짓고 그 친구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말만 걸었던 것 같다.
말하지 않는, 하지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
2008년 여름부터 2013년 4월 정리좌담회로 해소하기까지 대안개발연구모임에 함께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장수마을. 삼선4재개발예정구역이었던 그곳은 주거환경 개선이 절실했지만, 수익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설사들도 더는 기웃거리지 않고 지자체도 손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삶터를 빼앗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개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넘어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포부로 시작했지만 너무도 막연하였다. 주민참여를 통한 정비계획안 마련이 1차적 목표였기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지만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도 말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주로 가옥주인 할아버지들.
원하지 않는데 떠날 수밖에 없는 결과가 그 누구에게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할 수 없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답이 없었다. 그리고 계획안을 만들어도 이를 실제화하려면 주민들 안에서 의견을 모으고 조율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면 어렵다고 보고, 보다 긴 호흡으로 마을활동을 해나가는 것으로 2010년 활동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러면서 1년에 몇 번 워크숍이니 총회니 하며 주민들을 불러 모으기 급급했던 자리보다 마을학교, 골목길 번개모임 등 일상 속에서 다양하고 소소하게 찾아가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것에 더 집중하였다. 그러다보니,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다. 마을활동을 위해 당위적으로 만나야 했던 주민‘들’이 아닌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지닌 누군가로. 나와 장수마을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어떤 순간, 좀 더 도드라졌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왜 두려웠을까? 누군가 물어본다면 딱히 답할 만한 이유도 없긴 하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 활동이 끝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몫일까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오만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럿이 다양한 방식으로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사람이 지닌 역동성, 관계의 상호성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대한문에서 만난 ‘환대’
화재로 불탄 대한문 쌍용차분향소 천막을 다시 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일요일 늦은 저녁, 인근 서점에 갈 일이 있어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어느덧 1년이 되어 가는데 화재에 행정대집행에 자꾸 내몰리는 그곳을 그날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몇 차례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다 인사만 하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천막 안에 들어갔다. 몸 좀 녹이고 가라는 말에 잠깐만 앉았다 가야겠다 싶어 엉덩이를 붙였다. ‘함께살자! 농성촌’ 활동을 함께 했기에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것도 아니었다. 주로 집회하며 잠깐 스쳤던 게 전부라 같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대충 알고 또 짐작했던 쌍용차해고노동자들의 사정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딪히고 있는 삶의 이야기, 거기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감정의 몫들. 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날의 그 방문은 ‘환대’의 자리로 기억된다. 마땅히 해결할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켜켜이 쌓아뒀던 속 이야기들을 꺼내 보이며 저마다의 이야기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되었던 그 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크고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오롯이 사람과 사람으로, 평평하게, 민낯의 얼굴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일종의 초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으로의 초대.
앵무새처럼 쓸쓸함을 말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한 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굳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에 솔직해져야겠다. 관계는 거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앞질러 내 맘대로 계산기를 두드리고는 안전거리 확보 마냥 선을 그어놓았고, 그것에 스스로를 속박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원하고 만들고 싶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꿈꿀 관계는 서로의 삶으로의 초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은 어제를 보듬는 위안이 되기도 하고 내일을 내딛는 다짐이 되기도 한다.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살아가고 활동하며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을 텐데, 그것이 순간순간의 ‘일’이 아닌 초대의 여정이길 바라본다. 다시 그 여정을 시작하는 지금, 마주치고 새기게 될 얼굴들이 궁금하다.
덧붙임
민선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